인과5

카테고리 없음 2013. 7. 12. 20:58

인간과과학 제5

 

그리스 학자들은 생물을 식물, 동물, 인간으로 나누어서 생각했다. 그리고 생물체는 그 자신의 본질에 따라서 성장의 원리, 운동의 원리, 사고의 원리라는 세가지 원리 중에서 한가지 또는 그 이상의 원리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그들은 식물은 자라기만 하고 장소를 이동하지는 않기 때문에 성장의 원리를 가지고 있고, 동물은 장소이동도 하므로 성장과 운동의 원리 그리고 인간은 성장과 운동의 원리 외에 사고의 원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또한 이 세 가지 작용 즉 성장, 운동, 사고 작용을 일으키는 것으로 세 개의 영(spirit, 기운)이 있다고 보았는데, 이 세 영은 자연의 영, 생명의 영 그리고 정신의 영이다. 자연의 영은 성장을 가져오고, 생명의 영은 운동을 유발하고, 정신의 영은 사고작용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 학자들의 생리 이론을 인간의 소화, 호흡, 신경 체계와 결합해서 설명하는 독창적인 이론을 만들어낸 사람이 기원후 2세기에 로마 등지에서 활동했던 갈레노스(Galenos, Galen)라는 의사였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소화는 성장의 원인이 되는 자연의 영, 호흡은 운동의 원인이 되는 생명의 영, 그리고 신경은 사고작용을 일으키는 정신의 영과 관련되어 있다.

 

 

갈레노스는 정맥과 동맥을 서로 독립적인 체계로 구분하고, 완전히 다른 작용을 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에 의하면 정맥피는 우리가 섭취한 음식물이 간에서 변형되어 만들어지는데, 이 피는 성장의 원인인 자연의 영을 가지고 있고, 순환하는 것이 아니라 정맥을 통해 인체의 각 부분에 보내져서 주로 그것을 성장시키는 데 사용된다. 갈레노스의 이론에 따르면 우리가 음식물을 섭취하면 그것은 우선 위에서 농도가 진한 액체로 되고 이 액체는 위와 소장을 통해서 흡수되어 간으로 보내진다. 간에서 그것은 피로 바뀌고, 이 피는 정맥을 통해서 인체의 각 부분으로 흘러가서 소비된다.

이 정맥피는 심장의 우심실로도 가는데, 그 곳에서 이 피의 일부는 폐동맥을 통해서 폐로 전달되고, 일부는 우심실과 좌심실을 가르는 심장 격막을 거쳐서 좌심실로 들어긴다. 좌심실로 들어간 정맥피는 폐정맥을 통해서 전달된 공기와 섞여서 생명의 영이 되는데, 그것은 피가 음식물과 다른 것처럼 피와는 다른 액체이다. 이 생명의 영은 동맥을 통해서 신체 각 부분으로 전달된다. 생명의 영의 일부는 동맥을 통해서 뇌 쪽에 있다고 여겨졌던 조직(rete mirabile)으로도 가는데, 뇌에서 그것은 정신의 영으로 바뀐 다음에 신경 체계를 통해서 온몸에 공급된다.

갈레노스의 이론은 이와 같은 설명을 통해서 성장이나 호흡과 같은 생리 현상을 잘 설명할 수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심장을 중시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생리학 이론보다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갈레노스의 이론은 많은 해부를 통한 관찰을 바탕으로 해서 나온 것이지만, 그는 관찰을 하면서 두 가지 커다란 오류를 저질렀다. 이 오류는 첫째 심장격막에 구멍이 있다는 것과 둘째는 허파와 심장을 연결하는 폐정맥이 공기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었다. 이 오류들은 나중에 갈레노스를 추종했던 르네상스 시대의 해부학자들을 곤란에 빠뜨렸다. 이들이 이러한 곤란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갈레노스의 이론이 무너졌다고도 볼 수 있다.

 

갈레노스의 이론은 중세에 아랍세계를 통해서 유럽에 전해졌다. 그런데 중세에는 대학의 의학부에서 해부가 성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갈레노스의 중대한 오류에는 별다른 주의가 기울여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중세의 의학자들이 새로운 발견이나 연구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갈레노스의 저술을 요약하고 편찬하고 주석을 다는 데 더 열심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세에 소개된 갈레노스의 저작들은 그의 생리학이나 해부학에 관한 것은 얼마 없었고, 주로 질병의 원인과 치료에 관한 내용이 담겨있던 아랍어판이 번역된 것이었다. 따라서 그의 해부학적 저작들은 중세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그 결과 그의 오류도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던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에 들어오면 고대의 원전을 중시하는 경향이 나타났는데, 그 결과 갈레노스의 저작들이 대부분 라틴어로 편찬되었고, 그의 해부학 저술들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대학의 의학자들은 당연히 갈레노스의 해부학을 자세히 연구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그의 오류가 밝혀졌고 몇가지 수정이 가해졌다. 갈레노스의 해부학 연구가 가장 활발하게 수행되었던 곳은 이탈리아의 파도바 대학이었다. 이 대학 의학부에서는 르네상스 시대의 해부학자이자 의학자였던 베살리우스(Andreas Vesalius, 1514-1564)와 콜롬보 (Matteo Realdo Colombo, 1516-1559) 그리고 파브리치우스(Girolamo Fabricius, 1533-1619) 같은 학자들이 가르쳤다. 이들은 모두 해부학 연구를 통해 갈레노스 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사실들을 발견했다.

베살리우스는 심장을 해부한 결과 심장격막에는 갈레노스의 이론과는 달리 구멍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이 사실을 그의 유명한 책 <인체의 구조에 관하여>에 발표했다. 이 책은 1543, 코페르니쿠스의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 가 나온 같은 해에 출판되었는데, 여기에서 베살리우스는 격막구멍을 발견하지 못했고 피가 우심실에서 좌심실로 가는 것도 관찰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발표했다. 그렇다면 자연히 피가 어떻게 심장의 우심실에서 좌심실로 가는가 하는 문제가 생겼지만, 베살리우스는 이에 대한 답은 제시하지 못했다. 이 문제는 얼마 뒤 우심실의 피가 허파를 거쳐서 좌심실로 간다는 허파통과가 발견됨으로써 해결되었다.

 

허파통과는 이미 아랍세계에 알려져 있었지만 르네상스 시대에는 에스파냐의 세르베투스와 이탈리아의 콜롬보에 의해서 독립적으로 발견되었다. 허파통과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소순환, 즉 우심실의 피가 허파에서 산소를 공급받고 나서 좌심실로 가는 것과는 좀 다른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갈레노스의 가르침에 따라서 정맥피가 각 기관에서 소비된다고 보았고, 따라서 좌심실로 가는 피는 우심실에서 허파로 전달된 피 중에서 허파에서 사용되고 남은 소량의 피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들은 우심실의 피가 허파를 거쳐서 좌심실로 간다는 생각을 내놓기는 했지만, 그럼으로써 갈레노스의 생리학 이론을 뒤흔들 만한 어떤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온 것이 아니라 그의 생리학에 약간의 수정만을 가했을 뿐이다.

 

파도바 대학의 파브리치우스는 정맥에 판막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오늘날 우리는 이것이 정맥피를 한 방향으로만 흐르도록 하기 위한 것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파브리치우스는 이 판막이 그런 작용을 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고, 단지 정맥피의 힘을 약하게 하고 신체 각 부분이 영양분을 골고루 공급받을 수 있도록 피의 속도를 늦추는 작용을 한다고 보았다. 그도 베살리우스나 콜롬보와 같이 갈레노스 생리학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갈레노스 생리학은 영국의 윌리엄 하비가 혈액순환 이론을 확립함으로써 무너진다. 하비는 1578년에 영국의 폴크스톤(Folkestone)에서 탄생했다. 그는 1593년에 케임브리지 대학의 교양학부에 입학했으며, 여기서 4년 동안 교양학문과 철학을 공부했다. 교양학부를 졸업한 후 하비는 1600년에 그곳을 떠나 르네상스 시대의 의학 중심지였던 파도바 대학으로 갔다. 당시에 파도바 대학에서는 주로 갈레노스의 의학이 가르쳐졌고, 인체에 대한 해부시범이 의학교육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해부시범은 극장식 강의실에서 두주일에 한번씩 이루어졌는데, 거기에서는 인체 해부가 학생들 앞에서 직접 시연되었다. 그들은 범죄를 저질렀다가 처형당한 사람들의 사체를 넘겨받아서 해부를 했던 것이다. 그래서 학생들은 이 강의에 참석하여 사체가 해부되는 과정을 보면서 인체해부를 배울 수 있었다. 이 강의는 인기가 매우 좋았기 때문에 강의실은 항상 만원이었다. 해부시범 강의에서는 교수가 직접 해부를 하지는 았았고, 그가 지시를 내리면 조수가 해부대에 놓인 시체를 갈라서 내장을 꺼내 보여주는 식으로 강의가 진행되었다. 이와 같은 파도바 대학의 의학교육을 통해서 하비는 갈레노스의 의학과 해부학을 배웠다.

하비는 파도바 대학에서 그의 연구에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되는 스승 한사람을 만났는데, 이 사람은 파브리키우스였다. 파브리키우스는 1565년부터 1613년까지 아주 오랫동안 파도바 대학에 있으면서 해부학을 가르쳤다. 그런데 파브리키우스는 당시의 다른 사람들의 교수방법과는 다른 방식으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다른 교수들은 주로 해부시범을 통해서 갈레노스가 무엇을 말했는가를 보여주었지만, 그는 자기 자신이 직접 연구한 것을 가르쳤던 것이다. 파브리키우스는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연구방식에 따라서 자기 연구를 수행했는데, 이 점이 매우 독특한 것이었고 이 방식은 하비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르네상스 시대의 특징 중의 하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동물에 관한 저작이 주의를 끌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 예를 바로 파브리키우스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파브리키우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동물에 관한 광범위한 연구에서 영향을 받았고, 그와 마찬가지로 여러가지 동물을 해부하여 이것들의 기관들을 서로 비교하는 연구를 했으며, 심장 연구에도 주의를 기울였다. 그의 이와 같은 연구방식은 하비의 흥미를 끌었고, 스승의 영향을 받은 하비는 파도바 대학을 졸업하고 영국으로 돌아간 뒤 50년에 걸쳐서 많은 종류의 동물을 해부하는 연구를 하게 되었다. 이 연구결과 중 중요한 것 하나가 생리학의 혁신을 일으킨 혈액 순환의 발견이었다. 그러므로 하비는 대학에서 갈레노스의 의학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동물학을 배웠지만, 그의 혈액순환의 발견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점은 천문학과 역학 분야의 혁명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를 무너뜨리는 것이었지만, 생리학 혁명에서는 오히려 아리스토텔레스가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하비는 1602년에 파도바 대학 의학부를 졸업하고 의사자격을 얻었다. 그후에 그는 영국으로 돌아와서 런던에서 병원을 차려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고, 1615년에는 런던의 왕립의과대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하비는 의사로서 일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쉬지 않고 동물의 해부연구를 진행했다. 그는 이 연구를 거의 50년 동안 어느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서 수행했는데, 그가 연구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식의 동물해부였고, 주요 연구과제로 삼은 것은 심장과 동맥의 운동 그리고 동맥의 박동이었다. 하비가 심장을 연구대상으로 삼은 이유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심장을 동물의 가장 중요한 기관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하비는 동물의 심장은 생명의 근본이고, 소우주의 지배자이며, 모든 생기와 힘이 발산되는 태양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우리는 심장이 소우주의 중심이고 그것이 또한 대우주의 중심인 태양과 같다는 말에서 르네상스 시대의 소우주-대우주 유비관계의 영향도 엿볼 수 있다.

 

하비는 많은 종류의 동물들을 살아 있는 채로 해부했다. 그 이유는 심장의 작용을 좀더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였는데, 따라서 그는 특히 심장 박동이 느리기 때문에 관찰하기가 쉬운 냉혈동물의 심장을 연구했다. 그 결과 하비는 대정맥을 통해서 우심실로 들어간 피는 허파동맥을 통해서 모두 허파로 들어가고 허파를 통과한 후에는 좌심실로 전달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우심실에 판막이 있으며 이 판막이 피가 반대방향으로 흐르는 것을 막는 작용을 한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또한 허파를 통해서 좌심실로 들어간 피는 심장이 수축함에 따라 대동맥을 통해서 동맥계로 흘러간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의 하비의 발견은 세르베투스와 콜롬보가 발견한 허파통과를 확인하고 그 과정을 더욱 자세히 밝힌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하비는 이러한 발견에서 멈추지 않고 여기서 더 나아가 심장 판막의 작용에 대해서 생각한 결과, 피가 정맥을 통해서 심장 쪽으로 들어오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온 몸을 통해서 계속해서 흐른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각 심실 입구의 판막들은 피가 들어온 길로 다시 나가지 않도록 배열되어 있고 출구 쪽 판막들은 나간 피가 다시 들어오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던 것이다. 피의 순환이라는 생각을 입증하기 위해 하비는 좌심실에서 동맥으로 흘러가는 혈액의 양이 동물 신체에 들어 있는 혈액 전체의 양보다 훨씬 많다는 것을 계산을 통해서 보여 주었다. 그는 또한 여러 가지 실험을 통해서 피의 순환을 증명했다.

하비의 실험 중에서 가장 유명했던 것은 결찰사(結紮絲) 실험이었다. 이 실험에서 그는 줄을 자신의 팔에다 동여매고 정맥과 동맥의 흐름을 모두 차단했다. 이때 그는 묶은 부분의 위쪽에서 동맥이 부풀어오르는 것을 관찰했으며, 정맥은 막힌 채로 두고 동맥만을 풀어주었을 때는 동맥을 통해 따뜻한 피가 자유롭게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정맥은 결찰사로 묶인 부분의 아래쪽에서 부풀어오르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다. 동맥으로는 피가 계속해서 내려가지만 동맥에서 정맥으로 넘어간 피는 위로 올라올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비가 수행한 또 한가지 실험은 혈관에 가는 철사를 주입하는 것이었다. 이때 그는 철사가 한쪽 방향으로만 잘 들어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를 통해서 피가 혈관 속에서 한쪽으로만 흐른다는 것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하비는 자신의 혈액순환의 발견과 실험 결과를 1628년에 출판된 심장과 피의 운동에 관하여 (De motu cordis et sanguinis)라는 책에다 발표했다.

 

 

하비는 피가 순환한다는 것을 결찰사 실험 등을 통해서 증명했지만, 그것과 관련된 자세한 사항은 알지 못했다. 그는 순환을 증명하는 결정적인 증거인 정맥과 동맥을 연결하는 모세혈관의 존재를 보여주지 못했고, 피가 왜 허파를 통과하는가 하는 호흡과 관련된 문제도 설명하지 못했던 것이다. 모세혈관의 발견은 1661년에 현미경을 가지고 개구리의 허파를 관찰한 말피기(Marcello Malpighi, 1628-1694)에 의해서 이루어졌고, 호흡과 순환의 관계는 하비의 혈액순환을 받아들였던 그의 후계자들에 의해서 밝혀졌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하비의 혈액순환 이론은 점차 확고한 사실로서 인정되었고, 그에 따라 생리학의 혁신이 이루어졌다.

 

 

오늘날 과학연구를 하는 사람들은 모두 어느 정도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연구방법에 따라서 연구를 하지만, 그 방법에 대해서 의심하거나 새로운 방법을 만드는 일은 하지 않는다. 17세기에도 케플러, 갈릴레이, 뉴튼, 하비 같은 위대한 과학자들은 수학을 실제 연구에 적용하거나 실험을 하는 등 그 전의 과학자들과는 다른 방법을 사용해서 연구를 하기는 했지만, 새로운 과학연구 방법을 제시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당시는 과학의 변혁기였기 때문에 낡은 과학방법을 비판하고 새로운 방법을 추구하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그들 중 대표적인 사람은 영국의 프란시스 베이컨과 프랑스의 르네 데카르트였는데, 이들의 귀납적 방법과 연역적 방법은 모두 당시에 활동했거나 그 뒤에 나온 과학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또한 당시에는 중세에 설립된 대학이 새 과학에 적응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의 발달을 저해하는 작용을 했는데,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과학단체가 출현했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으로는 프랑스의 왕립 과학아카데미와 영국의 왕립학회가 있었다.

 

 

베이컨은 과학자도 아니었고 특별히 과학의 후원자 역할을 한 사람도 아니다. 그는 과학이 아니라 법학을 공부했고, 영국의 대법관을 지내다가 뇌물을 받았다는 이유로 그 자리에서 물러날 때까지 정치와 법률활동에 몰두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다른 한편으로 정치가로서 인류 또는 영국민의 번영이라는 문제에 대해서도 생각했으며, 이를 위해서 지식을 올바로 사용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일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지식을 모색하던 중에 그는 과학만이 진리와 인류번영에의 열쇠를 제공할 수 있고, 경험주의만이 올바른 과학연구의 열쇠를 제공해줄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여기서 그의 경험주의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놓고 관찰하는 데서 출발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경험주의와는 다른 것이다.

우리는 현대과학을 베이컨주의에 입각해 있다고 말한다.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베이컨이 과학지식의 목표를 궁극적으로 인류의 복리를 증진시키는 데 두었기 때문이다. 그 전에는 과학이란 자연을 그대로 관찰해서 그것의 운행과 이치를 찾으려는 활동이었지 그 지식을 가지고 어떤 실용적인 결과를 얻겠다는 활동이 아니었다. 그러나 베이컨은 자연이란 인간에게 봉사해야 하는 것이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과학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현대 환경문제의 뿌리는 베이컨주의와 기독교에서 찾아야 한다는 말을 하는 것이고, 환경문제는 과학기술이 발달하면 해결된다는 생각을 베이컨주의라고 부르는 것이다.

베이컨은 16세기의 파라켈수스와 같이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학문을 가르치는 대학을 비판하는 데서 출발했다. 그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그리스 자연철학자들은 올바른 방향에서 자연을 탐구했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들의 연구를 비판하고 거부함으로써 이 올바른 자연탐구가 상실되었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과학을 논리학에 종속시켰고, 실험을 이미 나와있는 결론을 확인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의 학문은 중세에 종교와 혼합되었고, 카톨릭 교회를 뒷받침하는 데 사용되었다. 베이컨이 보기에는 이와같이 과학이 논리학에 종속되고 종교와 혼합되어버린 상태에서 과학의 발달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인류의 복리에 기여하지 않았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과학을 발달시키기 위한 새로운 과학방법을 모색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방법을 제시했다.

베이컨은 우선 그때까지 축적된 그리스 학문과 그에 대한 주석을 모두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나서 학자들은 사실, 관찰 그리고 실험결과를 수집해서 그에 대한 목록을 처음부터 다시 작성하는 일을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이 일이 모두 완성된 다음에 우리는 그 목록에 수집된 사실을 바탕으로 참된 이론과 자연법칙을 도출할 수 있다고 보았다. 바로 이 주장에 그의 귀납적 방법이 들어 있다. 다시 말하면 관찰과 실험을 통해서 많은 사실을 수집하고 그 수집한 사실에 기초해서 보편적인 이론이나 법칙을 찾아내는 그의 새로운 과학방법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베이컨은 이와 같은 방법에 따라 연구를 하는 과학자를 꿀벌에 비유했는데, 그 이유는 꿀벌이 꽃으로부터 액체를 추출해서 그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유용한 꿀을 만들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서 단순한 경험주의자는 사실을 모아서 쌓아 놓기만 하는 개미와 같고, 철학자는 자기자신의 몸으로부터 뽑아낸 논리를 가지고 복잡한 그물이나 만드는 거미와 같다고 보았다.

베이컨의 귀납적 방법과 그것에 입각한 참된 과학활동이라는 생각은 그후에 영국의 과학자들과 왕립학회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실제로 17세기에 왕립학회 회원들은 대부분 베이컨주의자였으며, 지식이 힘이라는 베이컨의 주장을 믿는 사람들이었다.

 

 

데카르트도 베이컨과 마찬가지로 낡은 철학을 대체할 새롭고 보편적인 철학을 만들려고 했다. 그는 베이컨보다 훨씬 더 심하게 낡은 지식과 낡은 방법을 경멸했고 의심했다. 그래서 그는 기존의 모든 지식에 대해서 체계적으로 의심하는 극단적인 회의를 통해서 신과 자기 존재의 실재만을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cogito ergo sum)라는 말은 자기 자신의 실재를 믿는다는 것을 표현한 말이다.

신은 완전한 존재이고 따라서 인간을 속일 수 없기 때문에 데카르트는 인간이 인지한 것은 그 자신의 육체와 외부 세계의 존재와 부합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므로 그는 다음과 같은 사고 과정을 통하여 세계체계를 만들어내고 물리학을 연구하려 했다. , 신은 그 자신의 자유 의지에 다라 수학적 진리들을 영원하고 불변한 것으로 확정했다. 수학적 진리들은 자연의 법칙인데, 신은 이것들을 인간에게 선물처럼 주었다. 그러나 이 법칙들은 신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작용한다. 이 법칙이 물질에 작용할 때 어떠한 저항도 없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모든 자연현상을 기계적으로 설명하려고 했던 기계적 철학을 체계화했는데, 이는 그의 방법이 연역적이고 수학적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데카르트의 기계적 철학은 그의 우주관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사변을 통해서 우주가 물질(외연, 연장)과 운동으로 가득 차 있고 기계적인 접촉에 의해서 운행한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이에 입각해서 매우 기계적인 우주체계를 제시했다. 그는 외연과 운동만 가지고 주관적일 뿐인 다른 성질들도 모두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당시에 유행했던 우주에 대한 생기론적 설명이나 헤르메스주의의 신비적인 원격작용 그리고 뉴튼의 인력개념을 거부했다.

데카르트의 연역적 방법과 기계적 철학은 18세기 중엽까지 프랑스와 독일의 대륙과학에 영향을 미쳤는데, 그 결과 과학의 발전을 저해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데카르트의 방법과 기계적 철학은 지나치게 연역을 강조한 결과 독단적인 면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베이컨과 데카르트의 방법은 실제 과학연구로부터 나온 것이 아닌 방법 자체만을 강조하는 측면이 강했기 때문에 그 영향이 오래 지속될 수는 없었다. 따라서 18세기에 들어와서는 그들의 과학방법을 실제연구에 적용하기가 어렵다는 것이 점차 드러나게 되었다. 실제로 과학의 발달에 필요했던 연구방법은 연역과 귀납이 상호작용을 하는 종합적인 것이었는데, 이 방법은 갈릴레이의 연구에서 잘 나타난다. 갈릴레이는 베이컨이나 데카르트와는 달리 새로운 과학방법을 만들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운동에 관한 연구에서 매우 근대적인 과학방법을 보여 주었다. 예를 들어서 갈릴레이는 제일 먼저 수학적으로 기술할 수 있는 문제를 설정하고, 그 다음에 그 문제에 관한 기본 가정을 만들고, 이 가정을 실험 또는 사고실험을 통해서 검증하는 작업을 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현대의 과학자와 같이 양적으로 다룰 수 있는 특수한 문제를 선택하고, 거기에 대해서 가설을 세우고, 그것을 검증하기 위한 실험을 하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또다시 가설을 세우는 탐구방법과 비슷한 방법을 발견할 수 있다.

 

 

중세에는 현대와 마찬가지로 과학활동의 중심이 대학이었지만, 16,17세기에 들어오면 대학은 오히려 새로운 과학의 출현에 방해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근대 천문학이나 근대 역학의 탄생에 기여한 사람들을 보면 우리는 이들이 대체로 대학 밖에서 활동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티코 브라헤, 윌리엄 하비 같은 사람들은 모두 대학에서 공부를 하기는 했지만, 대학 밖에서 활동했으며, 갈릴레이도 한 때 대학에 몸담기는 했지만 여러 어려움을 겪은 끝에 대학을 떠났던 것이다. 이처럼 학문의 주된 장소가 과학연구에 대해서 폐쇄적이었던 상황에서 대학 밖에서 활발하게 수행되었던 과학활동은 대학이란 교육기관과는 성격이 다른 과학단체의 출현을 가져오게 되었다. 과학단체는 이러한 대학 밖의 과학연구자들이 서로 활발한 의사소통을 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에 생겨났다고 할 수 있다.

16,17 세기에 대학이 과학연구에 별다른 기여를 하지 못했고 과학단체들이 새로운 과학의 중심역할을 하게 된 것은 역사적인 배경을 가진 것이었다. 대학은 12세기에 아랍세계를 통해서 고대 그리스의 학문이 급격히 유입되면서 설립되었는데, 이 대학에서 주로 가르쳐졌던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이었다. 그의 학문은 기독교 신앙에 위배되는 면을 가지고 있었고, 따라서 신학자들과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 사이에서 마찰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17세기까지도 대학의 교양학부에서 주로 가르쳐졌던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이었다. 그리고 천문학이나 역학은 모두 교양학부에서만 배우는 것이었기 때문에 17세기에 새로운 천문학이나 역학을 만들려는 사람들은 그들의 주장을 대학 내에서 내세울 때는 대학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 결과 그들은 대체로 대학 밖에서 연구활동을 했고, 대학은 아리스토텔레스 학문을 가르치고 중세의 학풍을 지키는 일에서 앞으로 진전해갈 수 없었다.

 

당시에 등장한 과학단체로서 중요한 단체로는 프랑스의 과학 아카데미와 영국의 왕립학회가 있다. 과학아카데미는 국가의 후원을 받았고, 동시에 국가의 통제를 받았다. 과학아카데미의 회원은 16명으로 제한되었고, 정부의 임명을 받았고, 정부로부터 봉급도 받았다. 그리고 정부의 지원을 받아 재정이 풍부했기 때문에 지구의 크기를 측정하는 연구와 같이 개인으로서는 할 수 없었던 대규모 관측이 수반되어야만 가능한 연구도 수행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와 동시에 그들은 정부의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정부를 위한 특허국 역할도 했고, 따라서 순수한 과학연구에 제한을 받기도 했다.

영국에서는 1640년 경부터 런던에 과학자들이 모여서 토론을 벌이곤 했던 작은 집단들이 있었는데, 이 집단들에 참여했던 과학자들이 1660년에 공식적인 과학기구를 결성했다. 이 단체는 2년후인 1662년에 찰스 2세의 재가를 받아 왕립학회(Royal Society)라는 공식명칭을 얻었다. 왕립학회는 지금까지도 존재하는 학회로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학술단체이다. 이 학회는 왕의 재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왕립이라는 명칭 이외에 왕으로부터 받은 혜택은 전혀 없었던 순수한 민간단체였다.

그 운영은 거의 전적으로 회원들의 회비에 의존했고, 이 점에서 왕립학회는 프랑스의 과학아카데미와 근본적으로 달랐다. 따라서 회원이나 활동에서도 왕립학회는 과학아카데미와 크게 다른 점을 보였다. 프랑스에서는 정부주도로 엘리트 과학자를 회원으로 모으려 했고 그 숫자도 제한했지만, 영국의 왕립학회는 과학에 관심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가입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왕립학회는 아주 빠른 속도로 아마튜어 과학자들로 채워졌는데, 회원들은 하나의 방향이나 목적을 가지고 모여들었던 것은 아니다. 그리고 재정의 빈약과 회원들의 아마튜어리즘은 프랑스의 아카데미와는 달리 조직적인 연구를 할 수 없게 만들었다. 따라서 학회가 주로 할 수 있었던 일은, 베이컨식으로 과학지식과 정보를 수집하는 일이었다.

왕립학회는 과학아카데미보다 재정이나 조직면에서 빈약하기는 했지만, 17세기 말에 들어서면 경직된 과학아카데미가 쇠퇴하고 영국의 왕립학회가 유럽과학의 주도권을 잡게 된다. 당시에 과학의 발달을 위해서는 프랑스의 과학아카데미보다 조직적이지는 않았지만 정보수집이나 교환 등을 통해서 여러가지 과학활동을 격려할 수 있었던 왕립학회가 더 적합했던 것이다.

 

17세기에는 새로운 과학방법과 과학단체의 출현 외에도 근대적인 과학연구에 필수적이었던 여러가지 기구가 발명되었다. 이 기구들 중에서 중요한 것으로는 망원경, 현미경, 정밀시계, 온도계, 기압계, 공기펌프 등이 있었다. 그 중에서 망원경은 하늘의 연구를 혁신할 기구를 천문학자들에게 제공했다. 특히 갈릴레이는 획기적인 천체 현상을 발견하는 데 이 기구의 도움을 크게 받았다. 현미경은 하비의 피의 순환이론을 확인할 수 있게 했고,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것들을 볼 수 있게 해줌으로써 생물학 연구의 지평을 크게 넓혀주었다. 그리고 공기펌프는 중세까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되었던 진공을 만들고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과학자들에게 제공했다. 이 진공펌프를 가지고 처음으로 여러가지 과학실험을 했던 사람은 영국의 과학자 로버트 보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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