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과3
카테고리 없음 2013. 7. 12. 20:49제 3 강
유럽에서 중세는 보통 서로마 제국이 게르만족의 침입에 의해서 붕괴되기 시작하는 5세기 중엽부터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등이 시작되는 14세기 말, 15세기 초까지를 말한다. 우리는 흔히 중세를 암흑시대로 표현하곤 하지만, 중세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은 정당한 것은 아니다. 서양의 중세에도 계속해서 기술의 발전과 생산력의 증가가 있었고, 후기에 들어서면 학문활동이 매우 활발하게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학문 연구만을 따로 떼어 놓고 볼 때 서유럽의 중세 초부터 10세기 경까지는 학문의 불모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중세 이전의 로마들인이 그리스인들이 남긴 찬란한 학문적 업적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으며, 로마 초기의 학자들이 그리스 학문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일을 아주 등한히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결과 로마로부터 중세에 남겨진 그리스 학문은 상당히 보잘것 없는 것이 되었다. 그리스 저작들로부터 이것저것 조금씩 번역해서 편찬한 개요서 같은 것이 남아 있었으며, 조금 본격적인 저작으로는 플라톤의 티마이오스 일부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정도가 라틴어로 번역되어서 전해졌을 뿐이다. 이와 같은 상태는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계속되었는데, 그렇게 된 데에는 중세 기독교의 책임도 얼마간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중세 초기의 기독교는 다른 어떤 학문보다도 성경연구를 중요시했기 때문에 학문연구를 진작하기보다는 억제하는 면이 강했기 때문이다.
과학분야의 퇴보 현상과는 반대로 중세에는 전시기에 걸쳐서 기술이 발달했는데, 중세에 기술 발달을 촉진한 요인 중의 하나는 노예 공급의 감소였다. 노예가 줄어든 원인으로는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로마 제국이 세계 지배권을 상실한 결과 외부로부터 노예의 유입이 줄어든 것이다. 둘째 인간이 신 앞에서 평등하게 창조되었다고 하는 기독교 교리도 중세에 노예사용을 줄이는 데 기여했다.
3.1 아랍 지역의 과학
이슬람 과학 또는 아랍 과학은 약 8세기부터 15세기까지 이슬람 문화의 지배영역 속에서 발달했던 과학을 말한다. 아랍 과학은 8세기 중엽에 그리스 과학 저작들이 아랍어로 번역되는 번역사업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처음에 아랍어로 번역된 것들은 페르시아어와 시리아어로 된 의학 및 천문학 관계 서적들이었다. 이 저작들은 비록 그리스어로 쓰여진 저작들이 아니었지만, 실제로는 그리스 과학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이거나 그리스 저작의 번역본들이었다.
이렇게 시리아어나 페르시아어 저작들이 어느정도 번역되고 나서 그리스어로 쓰여진 서적들이 번역되기 시작했으며, 그 결과 불과 수십년 안에 고대의 중요한 과학연구서들이 아랍어로 옮겨질 수 있었다. 9세기에 들어와서는 이 번역작업이 칼리프의 지원을 받으면서 매우 왕성하게 진행되었다. 특히 알-마문이란 칼리프는 바그다드에 지혜의 집이라는 이름을 가진 연구 센터를 세우고, 거기에 여러 지역으로부터 많은 학자들을 초빙해서 번역과 연구활동을 지원했다.
바그다드의 연구 센터에서는 그 지역에서는 구할 수 없었던 그리스어 저작들을 구하기 위해서 동로마 제국으로 여러차례 사람들을 보내 그리스어 저작들을 사들인 다음에 그것들을 번역하기도 했다. 이 번역활동의 결과로 플라톤의 저작들과 아리스토텔레스, 히포크라테스 등의 저작들이 번역되었고, 그외에도 거의 모든 과학분야의 저작들이 번역되었다.
고대 그리스와 헬레니즘 시대의 많은 저작들이 번역된 후 이슬람 세계에서는 이 새로운 지식을 소화하는 작업과 함께 그것을 바빌로니아, 이집트, 페르시아, 인도 등지의 지식과 결합시키는 작업이 일어났고, 또한 여러 면에서 그것을 독자적으로 발전시키는 활동이 일어났다. 그 결과 각 부문에서 뛰어난 연구업적을 내놓은 학자들이 나왔으며, 그 중에서 유럽에도 이름이 알려진 사람으로는 알-킨디, 알-하이셈, 그리고 아비케나, 아베로에스 같은 학자가 있었다. 이들의 연구는 이슬람 문화의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고, 유럽으로 전파된 후에는 유럽 중세의 과학이 형성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랍 과학은 11세기 초에 전성기에 도달했는데, 그 후 12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천문학만 제외하고는 더 발달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 이유는 학문에 적대적인 이슬람 정통파가 득세했고, 아랍세계의 정치적, 경제적 상황이 나빠진 것에서 찾을 수 있다. 그래도 천문학은 15세기까지 계속해서 발달했지만,15세기가 되면 아랍 과학은 완전히 정체되고 만다.
3.2 아랍 과학 도입과 중세의 대학
아랍어로 번역된 그리스 학문과 이슬람화된 그리스 학문의 본격적인 유입은 11 세기 말에 이슬람이 지배하고 있던 스페인 남부의 톨레도와 시칠리아 섬이 함락됨으로써 시작되었다. 아랍 문화가 상당한 기간 동안 번영했던 이 지역이 다시 유럽의 손에 들어감에 따라서 유럽은 많은 그리스, 아랍 학문의 원천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그 전까지 지적인 기아 상태에 있었다고 할 수 있는 유럽인들이 아주 열성적으로 새로운 학문을 받아들여 그것을 우선 라틴어로 옮기는 작업을 시작했다.
12세기 초부터 많은 학자들이 유럽의 전 지역으로부터 스페인과 남부 이탈리아로 몰려들었고, 닥치는대로 새로운 지식을 번역했다. 그 결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 전체가 번역되었고, 갈레노스, 프톨레마이오스, 아르키메데스 같은 학자들의 그리스, 헬레니즘 학문이 번역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아비케나나 아베로에스, 그리고 알-킨디, 알-하이셈 같은 이슬람 학자들 고유의 저작들도 상당수 번역되었다. 그러나 이 번역은 그리스어로부터 직접 번역된 것은 아니었다. 대다수가 아랍어본의 번역이었으며, 아랍어에서 스페인어를 거쳐서 라틴어로 번역되거나 아랍어에서 히브리어를 거쳐서 라틴어로 번역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므로 이 과정에서 많은 오류가 들어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12세기에 활발하게 일어났던 번역 작업과 이로 인한 학문의 팽창을 우리는 12세기 르네상스라고 부른다.
번역으로 인한 학문의 양의 엄청난 팽창은 새로운 교육기관인 대학의 설립을 가져왔다. 대학이 설립되기 전까지 중세에서 교육을 주로 담당했던 기관은 수도원 학교와 성당 학교였다. 이 학교들은 물론 새로운 학문에 대해서 적대적이지는 않았지만 신앙의 보존,전파,해설이라는 그들의 본래 목적이 부과하는 제한 때문에 새 학문을 발전시킬 만한 역량은 갖추고 있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학교들은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여 발전시킬 수 없었고,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그리스 학문을 발전시키는 역할은 새로 출현한 교육기관인 대학이 담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대학은 12 세기 말 경부터 프랑스의 파리, 영국의 옥스포드, 이탈리아의 볼로냐와 파도바 등지에서 교수와 학생의 자치조합 또는 학생들만의 자치 조합의 형태로 나타났다. 이 대학들은 보통 교양학부, 법학부, 의학부, 신학부라는 4개의 학부로 구성되어 있었다. 대학들에는 유럽의 전 지역에서 학생과 교수들이 모여들었기 때문에, 유럽의 명실상부한 학문중심이라고 할 수 있었다. 대학의 학부 중에서 신학부.법학부.의학부는 교양학부를 거친 다음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교양학부에서는 인문학 분야라 할 수 있는 삼학 (문법, 수사학, 논리학)과 자연과학 분야라고 할 수 있는 사학 (산학, 기하학, 천문학, 음악)이 주로 가르쳐졌다. 그런데 13 세기 초에 교양학부의 주된 교과목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과학, 철학 같은 학문이 차지하게 된다. 그렇게 된 이유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이 거의 모든 분야를 포괄하고 있고 서로 통일되어 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의 철학자들 중에서 자연주의적 전통에 서서 학문연구를 했기 때문에 그의 학문에는 기독교 교리에 위배되는 사상이 담겨 있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그의 학문이 대학의 주된 교과목으로 자리를 잡게 되자 신학자들과 교양학부의 아리스토텔레스 추종자들 사이에서는 마찰이 빚어지게 된다. 교양학부 교수들은 중세 대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석자라고 불리웠던 아랍의 아베로에스의 전통을 따르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신앙과 과학의 영역을 분리해서 그 두가지가 각각, 다시말하면 신앙은 신앙의 영역 속에서 과학은 과학의 영역 속에서 고유한 진리를 가지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자연 탐구란 과학의 영역에서 이성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들은 기독교 신앙을 반대하거나 비판하는 일은 조금도 하지 않았고 자연탐구라는 영역을 떠나서는 경건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과학과 신앙의 영역을 분리하고 각 영역에 고유한 진리가 있다는 생각을 이중진리설이라고 부르는데, 이러한 이중진리 (double truth)설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과학의 영역에서 기독교의 근본 교리에 위배될 수도 있는 것을 가르쳤다. 예를 들어서 그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했던 바와 같이 세계는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존재한다고 가르쳤고, 영혼은 불멸이 아니라 육체가 소멸하면 함께 없어진다고 하는 영혼과 육체의 단일성, 그리고 신이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내용을 담은 세계는 인과법칙에 의해서 움직인다는 것 등을 가르쳤던 것이다.
이들의 이러한 자연주의적 합리주의의 태도는 신학자들의 반발을 샀으며, 결국 교양학부 교수들과 신학자들 사이의 충돌이 일어났다. 13 세기 초부터 시작된 이 아베로에스주의자들과 신학자들 사이의 마찰, 또는 자연철학과 신학의 충돌에는 주교와 교황까지 개입했으며, 그후 여러 차례 아리스토텔레스 자연철학에 대한 단죄(condemnation)가 단행되었다. 이 단죄 중에서 가장 정도가 심했고 그후 중세학문의 발달 경로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던 것은, 1277 년에 파리에서 내려진 단죄였다. 파리 교구에서는 교양학부 교수들의 가르침 중에서 219 개의 명제를 지정하여 그것을 가르쳐서는 안된다는 공고를 내놓았던 것이다. 이 명령을 어긴 사람은 교회에서 바로 파문당했고, 파문당한다는 것은 학자로서의 생명이 끝나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에 이 단죄는 매우 무서운 것이었다. 1277년의 단죄에 의해서 금지된 명제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었다.
세계에서 유일한 현자는 철학자들이다.(신학자들에 대한 모욕)
아무 일도 우연히 일어나지 않고 모든 일은 필연에 의해 일어나며, 장래에 일어날 모든 미래의 일은 필연적인 것이다.
최초의 원인(신)은 여러개의 세계를 만들 수 없었다.
적당한 인자 (아버지와 사람과 같은)가 없으면, 사람은 신만에 의해서 만들어질 수는 없다.
신은 새로운 행위의 원인일 수도 없고, 어떤 새로운 것을 만들 수도 없다.
신은 하늘(즉 세계)을 움직여서 직선운동을 하게 할 수 없으며, 그 이유는 진공이 남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이 대학의 중추 학문이 됨에 따라 단죄와 같이 그것의 기독교에 대한 영향을 줄이려는 노력이 있기는 했지만 이와 같이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으로부터 반기독교적인 요소를 제거하려는 노력은 결국은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말았다. 통일적인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으로부터 그러한 것을 제거하기도 어려웠고, 그런 부분만을 제거한다고 해도 그의 학문 곳곳에 스며 있는 반기독교적인 성향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결국 신학자들은 서서히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기독교화하는 노력을 기울였고, 마침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기독교화보다는 신학이 아리스토텔레스화하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 그러나 단죄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으로부터 벗어나는 노력도 가져오는 긍정적인 효과도 있었다.
3.3 중세 후기의 새로운 과학 논의
단죄의 영향을 받아 일어난 사조 중에서 중세 과학연구의 방향에 매우 커다란 영향을 준 것은 오캄 (William of Ockham, 1285?-1349?)의 학설이었다. 오캄은 프란치스코 교단의 수도사로서 철학과 논리학에 능통했던 신학자였는데, 단죄 이후에 나온 신학자들의 노력을 계승하여 신학을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으로부터 해방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는 아베로에스 학파가 자연 탐구의 영역에서 제한을 가했던 신의 전능과 자유를 강조했고, 따라서 신은 무엇이든지 창조할 수 있으며, 이 창조된 것들 사이에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어떠한 필연적 연관성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오캄은 필연적 연관성의 부재에서 출발하여 모든 지식은 선험적 추론이 아니라 직접적인 경험에 의해서만 얻어질 수 있다는 급진적 경험주의 에 도달했다. 또한 오캄은 보편 개념이란 실재하지 않으며 그것은 단지 개개의 물체를 나타내기 위한 이름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오캄과 단죄의 영향을 받은 중세 학자들 중에는 우주론과 운동이론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체계로부터 상당히 벗어나는 생각을 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 중 대표적인 사람은 영국 옥스포드 대학의 머튼 학파, 장 뷔리당, 니꼴 오렘이었으며, 이들의 업적은 16, 17세기의 코페르니쿠스나 갈릴레이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중세에 지배적이었던 우주체계는 지구가 부동이고 그 주위를 달, 태양, 행성 그리고 마지막으로 항성들의 천구가 돌고 있다고 하는 아리스토텔레스-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체계였다. 그러나 단죄 이후에 나온 14 세기 파리의 유명론자들은 지구의 자전 가능성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은 가장 무거운 원소인 흙을 주요 구성성분으로 가지고 있는 지구가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것은 경험에도 들어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파리 대학의 유명론자인 쟝 뷔리당 (Jean Buridan)과 니콜 오렘 (Nicole Oresme)은 지구의 자전을 가정하고도 천체의 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는 논리를 폈다.
뷔리당은 별들의 일주운동은 하늘이 지구 주위를 하루에 한바퀴씩 도는 것에 의해서도 설명되지만, 그와 반대로 지구가 그 축을 중심으로 하루 한바퀴 도는 자전에 의해서도 설명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커다란 항성 천구의 운동보다는 그것보다 훨씬 작은 지구의 운동을 통해서 천체 현상을 설명하는 쪽을 택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았는데, 이러한 논의는 나중에 코페르니쿠스나 갈릴레이에게서도 발견된다. 그러나 뷔리당은 경험적 이유에서 지구는 정지해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
오렘은 지구의 자전 가능성에 관해서 더욱 진지하고 날카롭게 논의했다. 그는 수직으로 던져진 돌이 뒤에 가서 떨어질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지구가 돌 때 공기와 물도 함께 돌기 때문에 돌도 지구와 똑같이 돌며 따라서 그러한 주장은 지구의 자전에 대한 반박으로서 타당하지 않다고 논박했다. 또한 우리가 하늘의 운동을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냐는 주장에 대해서는 운동의 상대성을 도입해서 반박했다. 즉 그는 바다에서 배 두척이 항해할 때, 배에 탄 사람은 자기 배가 움직이는지 다른 배가 움직이는지 결정할 수 없듯이 지구가 움직이더라도 지구에서는 하늘이 도는 것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에 하늘이 도는지 지구가 도는지 분명하게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신이 태양을 멈추게 했지 지구에게 정지하라고 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구는 부동이라고 하는 성경에 근거한 반박에 대해서는, 신은 기적을 행할 때 자연의 일반 운행에 혼란이 가능한 한 적게 가해지는 것을 선호할 것이기 때문에, 여호수아를 위해서 기브온 골짜기에서 멈춘 것은 거대한 하늘이 아니라 작은 지구였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여기서 우리는 오캄의 절약 원리의 영향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외에도 오렘은 여러가지 정교한 논리를 사용해서 지구의 자전을 가정하고도 천체의 현상을 아주 잘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보였다. 그렇지만 오렘은 이러한 논의를 더 발전시켜 지구가 회전할 수도 있다는 주장을 한 것이 아니라, 지구가 도는가 하늘이 도는가 하는 문제는 그와 같은 철학적 방식으로는 결정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성경의 시편의 세계도 견고히 서서 요동치 않는다 (시편 93편 1절)에 근거하여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정지해 있고 하늘이 일주운동을 한다는 전통적 견해를 고수했다. 오렘은 무엇보다도 프란치스코 교단의 수도사였고, 신학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근본적인 관심은 그러한 과학적 논의를 통해서 새로운 이론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을 철학의 침윤으로부터 건져내는 일이었다. 단죄의 정신에 충실했던 그가 지구의 자전 가능성에 관한 논의를 한 이유는 이성적인 논의로는 참된 지식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였다. 오렘은 참된 지식이란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3.4 르네상스 시대의 과학
르네상스 시대는 보통 15 세기 초부터 17 세기 초에 걸쳐 라틴 서양세계에서 학문과 예술이 크게 부흥하는 시기를 말한다.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주의자들과 예술가들 사이에서 널리 퍼져 있던 사조는 이 시대의 자연탐구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근대과학의 형성에 크게 기여한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이, 케플러 등은 모두 르네상스의 정신적,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자라난 사람들이었으며,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세례를 많이 받은 사람들이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중세말부터 형성되기 시작했던 수공업자와 상인계층의 활동도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그리고 그 결과 개인의 활동이 전보다 더욱 크게 평가받게 되었고, 개인은 교회나 공동체로부터 상당한 해방을 얻게 되었으며, 이러한 개인의 해방과 해방에 대한 욕구에 힘입어 종교개혁이 유럽의 넓은 지역에서 단단히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이러한 변화는 중세와는 다른 좀더 역동적이고 반권위적인 사회 분위기를 만들어 내었다. 중세의 아리스토텔레스 학문 체계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근대 과학도 이같은 사회 분위기 속에서 싹틀 수 있었던 것이다.
학문의 발달과 관련이 있는 르네상스 시대의 특징을 개관한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 르네상스기에는 중세 스콜라 학풍의 번역과 주해를 거부하고 그리스 원전 자체를 중시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학자들은 비잔틴 제국을 여행하여 아리스토텔레스, 프톨레마이오스, 플라톤, 갈레노스 그리고 아르케메데스 등의 원전들을 찾아서 번역했을 뿐만 아니라, 이 여행을 통해서 그러한 그리스 학자들의 문헌뿐만 아니라, 근대과학의 출현에 이들과 똑같은 영향을 미쳤던 헬레니즘 시대의 신플라톤주의, 헤르메스주의와 같은 신비주의에 관한 문헌들도 발굴했다.
둘째, 중세에는 학문적 저작과 학자들의 대화에서 라틴어만 사용되었던 것에 반해서, 르네상스기에는 민족언어의 사용이 서서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것은 당시에 민족 의식이 성장해서 그것이 반영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일반인들 특히 사회적 신분이 상승하고 있던 수공업자와 상인들이 그들이 읽을 수 있는 학문적 저작을 요구한 결과이기도 했다. 그래서 학자들은 학문적 성과를 널리 알리기 위해 자기 민족의 언어로 저작하기 시작했다. 그뿐 아니라 고대의 수학과 기술에 관한 저작들도 15 세기 말부터는 민족언어로 출판되기 시작했다. 특히 이탈리아에서는 장인들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에우클레이데스, 아르키메데스, 헤론의 수학과 기술에 관한 저작들이 민족언어로 나왔고, 17세기에 갈릴레이는 자신의 중요한 저작들을 이탈리아말로 썼다. 이러한 출판물들의 보급에는 당시에 구텐베르크에 의해서 발명되었던 인쇄술이 커다란 역할을 했다.
세째, 스콜라 학자들은 어떤 이론이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한 도구로서 논리만을 주로 사용했는데, 르네상스 시대에는 관찰과 실험, 즉 직접적인 경험을 중시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그에 따라 직접적인 관찰이 풍부하게 담겨 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동물에 관한 저작과 아르키메데스의 저작들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네째, 교회의 권위와 봉건제가 서서히 쇠퇴하면서 기술이 발달했고, 그 결과 수공업자들의 지위가 상승했다. 과학의 발달과 관련해서는 특히 역사상 처음으로 과학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장인들의 작업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갈릴레이가 쓴 두 개의 새 과학에 관한 논의 는 베네치아의 무기 공장에 관한 묘사로 시작되는데, 이것은 학자들이 수공업에 대해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갈릴레이는 또한 자기 자신의 작업장을 가지고 있었고 이곳에서 손수 망원경을 제작했으며, 근대 천문학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케플러는 포도주 통의 부피를 재는 법을 제시하기도 했다.
다섯째, 신비주의가 널리 퍼졌다. 예를 들어 우주의 신비를 푸는 열쇠는 수학과 기하학에 있다고 하는 신플라톤주의, 우주는 신비적인 힘들로 가득 차 있는 네트워크이고 인간은 이 힘들과 상호작용해서 우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하는 헤르메스주의, 인간이 본질적으로는 우주의 축소판이라고 하는 대우주-소우주 유비관계에 관한 생각, 그리고 성서를 숫자로써 풀려고 했던 카발라 전통과 같은 신비주의가 널리 퍼졌던 것이다.
뉴튼의 만유인력이란 개념, 즉 멀리 떨어져 있는 물체가 서로 끌어당긴다는 생각도 그런 신비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우리가 과학과는 전혀 관계가 없고 오히려 과학의 발달에 장애요인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신비주의도 근대과학이 출현하는 데 기여했던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헤르메스주의는 1453년 콘스탄티노플의 함락 직후 헤르메스 문헌들(Corpus Hermeticum)이 이탈리아의 피렌체에 소개되면서 유럽에 퍼지기 시작했다. 당시에 사람들은 이 문헌들의 저자가 모세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이집트의 사제 헤르메스 트리스메기토스(Hermes Trismegistos, 삼중으로 위대한 헤르메스)라고 보았으며 이것은 1463년 아탈리아의 인문주의자 마실리오 피치노(Marsilio Ficino, 1433-1499)에 의해서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이 문헌들은 성경이 쓰여지기도 전의 것으로 모세와 대등한 또는 더 위대한 현자에 의해서 쓰여진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에 대단한 반향을 일으켰으며, 그에 따라 헤르메스주의는 유럽에서 급속히 퍼져가게 된다. 그러나 이 문헌들은 1614년 문헌학자 이삭 카우사보누스(Isaak Causabonus)에 의해서 오래된 이집트의 지혜를 담은 책이 아니라 1세기 경 헬레니즘 시대의 것이라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그후 헤르메스주의는 점차 영향력을 잃고 말았다. 헤르메스주의의 대표적인 가르침은 세 가지로서 하나는 소우주-대우주 유비관계이고, 전체로서의 세계와 세계에 존재하는 만물이 혼을 가지고 있다는 전심론(全心論, panpsychism), 그리고 세계의 각 지점들이 서로 작용한다는 공감-반감론이다.
3.5 과학혁명
르네상스 시대 중엽부터 시작된 과학혁명은 유럽의 발전에 대단히 큰 영향을 미쳤다. 영국의 역사학자 버터필드는 과학혁명의 영향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르네상스 인문주의나 종교개혁은 이에 비하면 하나의 에피소드에 불과하다고 말했는데, 이와 같이 과학혁명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은 상당한 타당성이 있다. 왜냐하면 과학혁명이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는 결과만을 따로 떼어서 볼 때 그것은 르네상스나 종교개혁보다 더 큰 영향을 근대 사회에 미쳤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과학혁명은 그 내용만을 분리해서, 즉 이에 크게 기여했던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갈릴레이, 뉴튼 등의 업적만을 분리해서 고찰할 수는 없다. 이들은 모두 르네상스기의 다양한 사건이나 사조의 영향을 풍부하게 받았다. 따라서 과학혁명은 앞에서 말한 르네상스 시대의 여러가지 새로운 분위기가 점차로 익어감에 따라 일어났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과학혁명은 과학 전반 또는 과학의 일 부문에서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과학혁명은 르네상스 시대 중엽, 즉 16세기 중반부터 시작되었다. 굳이 연도를 든다면 코페르니쿠스가 태양중심체계를 내세운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 가 발표된 1543년에 시작되어 뉴튼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가 출판된 1687년에 끝났다고 할 수 있다. 이 기간 동안 그때까지 널리 받아들여져 왔던 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체계가 거의 대부분 새롭고 근대적인 것으로 변혁되고 말았다. 우주론과 천문학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중심 우주체계가 코페르니쿠스-케플러의 태양중심의 우주체계로 완전히 바뀌었으며, 역학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스콜라 학파의 역학이 갈릴레이-뉴튼의 역학으로 대체되었다. 생리학에서는 중세에 완벽한 권위를 행사했던 갈레노스의 체계가 하비의 새로운 생리학 이론으로 바뀌었고, 과학의 방법과 과학활동이란 면에서도 변화가 나타났다. 프란시스 베이컨, 데카르트, 갈릴레이가 새로운 과학연구 방법을 제시했고, 영국의 왕립학회, 프랑스의 과학아카데미 등 과학자들이 모여 집단적으로 발표하고 토론하는 과학단체들이 출현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