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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없음 2013. 7. 12. 21:06

13강 갈릴레이

 

과학의 역사에서 16, 17세기는 변혁의 시기였다. 이 시기에는 천문학,역학, 생리학 같은 여러 과학분야에서 낡은 이론과 체계가 무너지고 새로운 이론들이 나타났다. 특히 천문학에서는 고대로부터 내려온 지구중심의 우주체계가 무너지고 코페르니쿠스와 케플러에 의해 태양중심체계가확립되었다. 태양중심체계의 주된 내용은 간단히 말해서 태양이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돈다는 것인데, 이와 관련해서 가장 유명해진 사람은갈릴레이이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는 우리에게 지구가 자전하며 태양 주위를 돈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태양중심체계라는 진리를 옹호했다가 종교재판이라는 형태로 가톨릭 교회의 모진 탄압을 받았던 사람으로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들으면 우리는 항상 그가 재판정을나서면서 이야기했다는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는 말을 떠올린다. 갈릴레이는 우리 마음 속에 진리의 발견자, 종교의 탄압에 어쩔 수 없이 굴복하기는 했지만 옳은 것을 지키려고 했던 사람으로 굳게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생애, 진리의 옹호과정 그리고 재판과정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가 처음부터 로마교회와 대항하려는 생각은 전혀 가지고 있지않았고, 따라서 목숨까지 걸고 열렬하게 태양중심체계를 옹호한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한 사람의 과학자로서 교회에 대항한 것이 아니라, 당시에 교황의 후원을 등에 업고 이탈리아에 퍼져갔던새로운 철학의 중심 인물로서 새로운 철학지지자들이 스콜라주의를따르는 전통적 철학추종자들과의 싸움에서 패배하자 상징적으로 단죄를 당했던 것이다.

 

갈릴레이는 어렸을 때 예수회에서 운영하는 세미나에서 3년 동안 공부했는데, 엄격한 학교의 규율에 잘 따르면서 열심히 공부하는 모범적인 학생이었다. 이때 갈릴레이에게 주어진 가톨릭 교육으로 그는 죽을 때까지상당히 경건한 가톨릭 신앙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갈릴레이는 천성적으로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과 약간 반항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이러한 특성은 대학 시절에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그래서 그는 피사대학에 다닐 때 당시에 대학에서 가르쳐지고 있던 중세의 아리스토텔레스적인 학문을 비판했고, 이러한 오래된 학문을 울궈먹으면서 허세를 부리던 교수들을 조롱했기 때문에 장학금을 받지 못하기도 했다. 또한 1589년젊은 나이로 피사대학의 교수가 된 그는 대학교수로 있으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을 공격했고, 대학의 오만하고 고지시한 법규들에 대해폭로하는 등 권위에 대항하는 일을 일삼았기 때문에 3년 후에는 재임용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그렇다고 해서 갈릴레이가 자기 목숨이나 안락을포기하면서까지 자신의 생각을 어디서나 대담하게 떠들어댔던 것은 아니다. 그는 새로운 과학적 사실을 발견하는 일에 열심이었고 이러한 발견을 알림으로써 명성을 얻고 싶어하기는 했지만, 자신의 명예, 재산, 장래에 관련된 일에서는 신중하게 계산해서 일을 처리하는 매우 용의주도한면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갈릴레이가 어려서부터 기존의 중세적인 가르침들을 비판하고다녔다는 사실로부터 그가 학생시절에 이미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우주관에 회의적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그의나이가 거의 50이 될 때까지 공개적으로는 태양중심체계를 옹호한 적이없었다. 피사대학을 물러난 후 갈릴레이는 파도바대학 교수가 되었는데갈릴레이는 두 대학에서 모두 학생들에게는 오히려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이 나온 지 반세기가 지난 후인 그때까지도 대부분의 사람이 옳다고 믿고있던 지구중심체계를 가르쳤던 것이다. 그는 아마 파도바 대학에서 교수생활을 한 지 5년 후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 우주체계가 옳다는 결론에 이르렀지만 이를 공개적으로 강의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갈릴레이가 이렇게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서 놓여 있고 움직이지 않는다고 가르쳤던 이유는 그가 태양중심의 우주관을 옹호할 경우 오래 전에 코페르니쿠스가 염려했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의 조롱을 당할 것을 두려워했기때문이다. 또한 지구가 움직인다는 것을 하나의 가설로 받아들이고 가설로서 가르칠 수는 있지만, 그럴 경우 이에 대해서 지구중심설을 지지하는사람들로부터 제기될 반대 논거를 논박할 증거가 충분하지 않다는 이유로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공개적으로 옹호하지 않았다. 그래서 갈릴레이는 1609년까지도 계속해서 자기 믿음과는 정반대로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놓여있고 태양을 비롯한 행성들이 그 주위를 돌고 있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그런데 1609년에 갈릴레이에게는 아주 놀랄 만한 소식이 날아들어왔다. 이것은 어느 네덜란드 사람이 먼 곳에 있는 물체도 똑똑히 볼 수 있는망원경을 발명했다는 소식이었다. 160810월 네덜란드의 안경제작자리퍼레이는 멀리서 볼 수 있는기구를 제작하고 그 특허를 신청했다. 갈릴레이의 친구 파올로 사르피는 외교적인 접촉을 통해 이러한 발명 소식을 접하고 16097월 베네치아를 방문한 갈릴레이에게 이 얘기를 전해주었다. 처음에 갈릴레이는 이 기구를 보기를 원했고, 그것이 파도바에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베네치아를 떠나 파도바로 달려갔지만 망원경과그 소유자는 이미 떠나버리고 없었다. 그러나 갈릴레이는 이에 대한 아주훌륭한 설명서를 구할 수 있어서 갈릴레이도 유리세공 기술자와 함께 즉각 자기자신의 작업실에서 망원경을 제작하는 일에 착수했다. 그리고 수없이 많은 실패를 거듭한 끝에 당시로서는 가장 성능이 뛰어났던, 배율이30배나 되는 망원경을 제작했다. 이 기구를 만든 다음에 그는 그것을 베네치아 공화국에 기증하여 자신이 가지고 있던 파도바 대학 교수좌의 연봉을 크게 올리고 교수좌를 종신직으로 바꾸는 데 이용하기도 했지만, 그의 학문적 관심은 이 기구를 하늘로 향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는 우선 달을 관찰했다. 그가 본 달은 그때까지 사람들이 생각해 왔던 흠없고 둥글고 완전한 달과는 아주 딴판이었다. 달은 완전한 원형도아니었고 수정처럼 매끄럽지도 않았으며, 지구와 똑같이 산과 골짜기가있는 울통불퉁한 것이었다. 그후 그는 망원경을 목성 쪽으로 향했는데,이때는 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이 행성 주위에는 네개의 새로운 별이 있었고, 게다가 이 별들은 목성 주위를 공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말해서 갈릴레이는 목성 주위를 도는 네 개의 위성을 발견했던 것이다.

 

갈릴레이는 이 네 별들의 이름을 그의 고향인 피렌체가 있는 토스카나 공국을 지배했고 자신의 후원자 역할을 했던 당시 이탈리아의 유력자 메디치 대공의 이름을 따서 메디치의 별들이라고 명명했다. 그가 이와 같은이름을 붙였던 주된 이유는 파도바 대학을 벗어나 메디치가의 궁정 수학자가 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갈릴레이의 발견은 당시로서는 엄청난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우선 달이 지구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은 하늘과 지구가 완전히 다르다고 봄으로써 그때까지 하늘과 지구를 갈라놓았던 고대와 중세의 우주관을 뒤흔드는 것이었다. 고대와 중세인들은 하늘과 지구를 철저하게 분리했는데, 그들은 하늘은 지구와는 완전히 다른 물질로 구성되어 있고, 완전한원운동 외에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가르쳤다. 반면에 지구는 흙,, 공기, 불이라는 사원소로 이루어져 있고 온갖 변화, 생성, 소멸의 지배를 받는다고 가르쳤다. 그런데 하늘에 속한 달도 지구와 그다지 다를 바없고 따라서 지구를 구성하는 물질과 비슷한 것으로 이루어져 있을 것이라는 갈릴레이의 발견은 그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을 완전히 부수어 버렸던 것이다. 또한 목성이 위성을 가지고 있다는 발견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를 근본적으로뒤흔드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 새로 발견된 별들의 중심은 지구가 아니라 목성이었으며, 따라서 이제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이 경험적으로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놀랄 만한 발견을 하고 나서 갈릴레이는 주저하지 않고 그 사실을 별들의 소식 (Sidereus Nuncius)이라는 책으로 발표했다. 그가 그때까지는 학생들에게 지구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지구중심체계를 가르쳤다는 점을 생각해서 조금은 망설였을 법도 한데 그는 전혀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다른 사람이 먼저 발표할새라 16101월에 관측을 완료하고 그 결과를 두달도 채 지나지 않은 3월 초에 책으로 출판했던 것이다.

 

그 당시에 갈릴레이의 나이는 46살이었는데, 이 책은 그의 최초의 학문적인 저작이었다. 그가 서둘러서 책을 발간한 이유는 자기가 다른 사람보다먼저 달과 목성에 관한 사실을 최초로 발견했다고 하는 발견의 우선권을지키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이제 장년의 나이가 되었는데도 이탈리아 안에서만 조금 알려져 있던 자기 이름을 전유럽에 알리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갈릴레이가 다른 글들은 대부분 이탈리아어로 썼던 것과 달리<별들의 소식>을 유럽 공통어였던 라틴어로 저작했다는 것에서도 알 수있다.

 

책은 출판되자마자 사람들 사이에서 엄청난 반향을 얻었고, 갈릴레이의 이름은 하루아침에 유럽 전역에 퍼지게 되었다. 그는 이제 자신이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그에 상관없이 태양중심적인 우주체계의 대변자가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갈릴레이는 망원경에 의한 발견으로 명성도 얻었고, 목성의 위성을 메디치의 별이라고 명명함으로써 메디치 가문의 왕실수학자로 임명되는 영예도 얻었지만, 이와 동시에 태양중심체계를 둘러싼 그의 수난도 시작되었다.

 

그는 이 사실을 발표하면서 처음에는 계산이나 사변에 의한 것이 아니라 직접적인 경험에 기초한 증거가 발견되었으므로 (책이 나온 후 갈릴레이는 후속 관찰에서 금성이 위상변화를 한다는 것과 태양에 흑점이 있다는 태양중심체계에 유리한 또 다른 증거를 발견했다), 이제는 다른 사람들도 모두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체계를 믿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은 갈릴레이의 판단착오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반항적이었고약간 괴퍅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적들을 만들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우주에 대한 고대와 중세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었다. 이들은갈릴레이가 망원경을 사용해서 거둔 성과로 얻은 명성과 재산을 그대로향유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의 적들은 갈릴레이의 발견이 과연 믿을 만한 것인가 라는 의문을 제기하고 태양중심체계 자체를 공격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또 가톨릭 교회까지 움직여서 코페르니쿠스의이론이 성경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그것을 공식적으로 금지하려는 운동을펼치기도 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갈릴레이는 1615년에 로마의 교황청을 직접 방문해서 가톨릭 교회를 자기편으로 만들려고 시도했다. 그는 토스카나 궁정수학자로서 로마의 토스카나 대사 관저에 오랫동안 머무르며 자신의 발견에 대해 교황 바오로 5세와 교황청의 성직자들에게 열심히 설명했지만이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고, 교회는 1616년에 코페르니쿠스 이론을 가르쳐서도 안되고 옹호해서도 안된다는 금지령을 선포했다. 갈릴레이는 현명하게도 이에 순종했고, 연구에만 몰두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로마의친구들과 태양중심체계를 포함하는 새로운 철학에 대해서 논의하지 않은것은 아니었다. 그는 로마를 방문했을 때 로마에서 실험에 바탕을 둔 새로운 철학, 즉 새 과학을 세우려는 것을 목표로 하는 린체이 아카데미 회원으로 받아들여졌고, 이들과 함께 과학에 대한 논의를 계속해왔던 것이다. 린체이 아카데미는 당시 로마에서 우후죽순격으로 생겨나고 있던 새로운 사조를 추구하던 많은 집단들 중 대표적인 집단이었고, 그 주된 대항자는 로마의 예수회 대학인 콜레기움 로마눔이었다. 콜레기움 로마눔(그레고리우스 대학으로 이름이 바뀌어 현재까지도 존속하고 있음)은 반종교개혁의 기수로서 카톨릭 정통 신앙을 지키는 것을 목적으로 설립된예수회의 연구와 교수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학문과 신학에서도 철저하게아리스토텔레스적인 스콜라철학을 따르고 있었다. 스콜라철학은 성서와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을 철저한 권위로 인정하고 자연현상까지 포함하는 모든 현상을 그 권위로써 설명하려는 것이었는데, 새로운 철학은 이에반대하여 개인적인 해석이나 실험과 관찰에 입각한 해석을 중시하는 것이었다. 스콜라 철학의 중심은 문헌해석이었고 새로운 철학의 중심은 직접적인 관찰, 경험, 실험에 입각한 해석이었기 때문에 이 둘은 철저히 상반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새로운 철학의 중심 방법이 바로 새 과학의 그것이었기 때문에 갈릴레이 같은 과학자야말로 새로운 철학의 대변자로내세워지고 있었다.

 

따라서 갈릴레이가 로마를 떠난 후에도 로마에서는 예수회 중심의 스콜라주의자들과 린체이 아카데미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철학의 지지자들간의 싸움이 수면 위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의 싸움은 교황, 종교재판청, 금서 선정회의 등의 성향에커다란 영향을 받았는데, 교황이나 종교재판 책임자들이 새로운 사조에대해 관용적인 경우는 전세가 예수회에 불리하게 돌아갔고, 반면에 교황등이 전통적 가르침을 강하게 수호하는 경우 전세는 새로운 철학에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린체이 아카데미는 이탈리아에서 가장뛰어난 과학자이자 문장가로 인정받고 있던 갈릴레이와 함께 예수회의콜레기움 로마눔의 주장을 철저하게 깨부술 수 있는 책을 준비하고 있었다. 갈릴레이는 1620년 경에 이 책의 초고를 완성했는데, 이 책 제목은 시금자(금의 순수성을 검사하는 사람)였다. 시금자의 초고는 오랜 기간에걸쳐 린체이 아카데미의 여러 회원들이 돌려 읽었고, 이러는 가운데 내용과 문장이 다듬어져 새로운 철학을 대변하고 예수회의 주장을 누를 수 있는 내용으로 채워졌다. 시금자는 갈릴레이의 저작 중에서 가장 기지에 차고 수사학적으로 뛰어난 것에 든다. 다음과 같은 내용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만약 나의 적수가 내가 바빌로니아의 천문관측기록서를 읽고바빌로니아인들이 계란을 밧줄에 매달아 재빠르게 내돌리며 익힌다는 것을 믿기 원한다면 나는 그렇게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결과의 원인은 그가 제시한 것과는 아주 다르다는 것을 말해야겠다.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 나는 다음과 같이 사고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다른 사람들이 이전에 얻었던 결과를 얻을 수 없다면 우리의 작업에는 그러한 결과를 가져오는 원인 중의 무언가가 부족함이 틀림없고 만약 우리에게 단 한가지가보족하다면 바로 그것이 원인일 것이다. , 우리에게는 계란도 부족하지않고, 밧줄도, 그것을 휘두를 건장한 일꾼도 부족하지 않다. 그러나 계란은 여전히 익지 않고, 그것이 처음에 뜨거웠다면 도리어 휘두르는 동안금세 식을 것이다. 바빌로이아인이라는 것만 빼고는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없기 때문에 달걀을 익히는 원인은 바로 바빌로니아인이라는 것이다.”시금자는 1623년에 출판되었는데, 출판에 즈음해서 새로운 교황이 선출되었다. 그런데 이 교황은 전임 교황들과 달리 새로운 철학에 매우 호의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갈릴레이와 잘 아는 사이였고, 또 수학과 천문학에 조예가 깊었다. 그는 추기경 마페오 바르베리니(Mafeo Barberini)로서 갈릴레이와 같은 피렌체 출신이었는데, 1623년 교황으로 선출되어 교황 우르바누스 8(Urbanus XIII)세가 되었다.

 

갈릴레이와 린체이 아카데미 회원들에게는 하나의 서광이 비치는 듯했다. 이들은 새 교황이 예수회라는 수구세력을 견제하고 성경이나 세계에 대한 자유주의적인 해석을 상당히 옹호해 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갈릴레이와 린체이 아카데미는 시금자를 교황에게 헌정했고, 교황은 이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교황은 또한 스스로 시금자를 읽으면서 대단히 즐거워했다고 한다. 상황은 갈릴레이와 새로운 철학의 지지자들에게 아주 유리하게 돌아갔다. 시금자는 콜레기움 로마눔의 가르침을 비웃는 내용으로가득 차 있었지만, 교회의 수장인 교황이 그 내용을 완전히 인정했기 때문에 예수회는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회가 갈릴레이와 린체이 아카데미의 주장에 동의한 것은 전혀 아니었다. 콜레기움로마눔의 예수회 학자들은 로마 교황청의 자유주의적인 분위기에 눌려시금자에 대한 비난을 삼가고 있었을 뿐이지 호시탐탐 반격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이다.

 

마페오 바르베리니가 교황이 되고 시금자가 큰 성공을 거두자 갈리레이는 교황이 1616년의 금지령을 풀어줄 수도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게되었다. 그리하여 갈릴레이는 1624년에 이 새로 선출된, 친구이기도 했던교황을 알현하여 태양중심체계의 우수성을 역설하고, 그에 대한 증거를제시함으로써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위한 전환점을 마련하려고 했다. 교황은 시금자 출판 후 로마를 방문해 있던 갈릴레이를 매주일 만나주는 대단한 환대를 베풀었다. 이들은 만나는 자리에서 시금자에 대해, 수학과우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갈릴레이는 이 자리에서 코페르니쿠스체계에 대한 단죄의 해제를 기대했다. 그러나 결과는 애초에 그가 기대했던 것에는 못미치는 것이었다. 갈릴레이가 교황으로부터 얻어낸 것은 이우주에 관해서 갈릴레이 자신의 견해를 발표는 해도 되지만, 즉 그것을가설로서 다루고 이에 대해 논해도 되지만, 그것의 결론이 태양중심체계에 유리하게 나와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로마에서 돌아온 갈릴레이는 교황의 이와 같은 제한적 허가나마 이용하기로 결심하고, 그후 태양중심체계에 관한 책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린체이 아카데미 회원들과의 토론과정과 다른 여러 성직자들과의 논의를거치면서 6년간의 노력 끝에 책은 마침내 1630년에 완성되었다. 그러고도 이 책은 로마 금서목록 책임자나 로마의 책임있는 추기경들의 손을 거쳐 문제가 될 수 있는 부분의 수정을 거쳤고, 거기에다 교황청의 공식 출판허가를 받아야만 했기 때문에 정식 출판이 되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걸렸다. 그래서 결국 그의 저작은 1632년에 두 개의 대 우주체계에 관한대화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이 책은 나오자마자 열화같은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갈릴레이는 책 속에서 지구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생각을 옹호하는 심플리치오, 지구가 움직인다고 주장하는 살비아티 그리고 이 두 사람의 논쟁을 즐기면서 두 주장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우수한가를 판정하는 중립적인 태도의 사그레도세 사람을 등장시켜 대화의 형식을 빌어 내용을 전개해 나갔다. 토론은 4일로 나누어 진행되었는데, 첫날에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의 경우가 기술되었고, 두 번째와 세 번째 날에는 지구의 자전과 공전운동을, 마지막날에는 갈릴레이가 자신의 조수 이론을 다루었는데, 갈릴레이는 그것이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을 지지하는 최고의 증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마지막은 교황의 바램에 거슬리지 않도록 신의 전능함에 대한 주장으로결론지어졌다. 그런데 책의 내용은 형식적으로는 갈릴레이가 어느 이론이 옳다는 식의 결론을 내리지 않는 것처럼 기술되어 있었지만, 실제로는그 대화를 읽은 사람이면 누구나 태양중심체계의 우수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게다가 이 책은 일반인도 읽을 수 있도록 라틴어가 아니라 이탈리아어로 쓰여졌기 때문에 그의 적들에게는 매우 위험스러운 것으로 보였다. 따라서 그들은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해서 갈릴레이를 공격했고 심지어는 그가 심플리치오를 교황을 대변하는 것으로 해서교황 자신을 조롱하려 했다는 모함까지 했다. 그 결과 갈릴레이는 16331616년의 금지령을 어겼다는 이유로 로마로 와서 종교재판을 받으라는소환명령을 받았다.

 

그런데 갈릴레이의 우주체계에 관한 대화의 내용이 코페르니쿠스체계를 더 찬양하는 것이었다고 해도 이 책은 플라톤식의 대화 형식을 취하고있고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하나의 가설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코페르니쿠스 체계가 옳다고 주장한다고 볼 수는 없었다. 다만 논쟁을 통해 코페르니쿠스의 가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보다 더 나을 수 있음을 보여주었을 뿐이었다. 따라서 교황청의 의지에 따라서는 아무 문제도 없이 지나갈 수도 있었다. 교황청은 그때까지 새로운 철학에 대해 호의적이기까지했던 점을 고려하면 교황이 갈릴레이를 얼마든지 관용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바로 갈릴레이의 대화가 출판된 1632년에 교황은 교회 정치적으로 상당히 궁지에 몰려 있었다. 그는 새로운 철학에 호의적이라는 것과 신구교 사이에 30년 전쟁이 벌어지던 중이던 당시에 신교군대에 대항해 싸우던 스페인과 신성로마제국을 편들지 않고 프랑스와손을 잡고 있었다는 것 때문에 추기경들로부터 공개적인 공격을 받았다.

 

이 공격은 전통적 교리와 철학을 지키려 했던 예수회 중심의 분파들로부터 나온 것이고, 상당수의 추기경들이 교황에 대한 공격에 가담했기 때문에 교황은 점차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결국 스웨덴 국왕이 이끄는 신교군대가 독일 남부를 유린하고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넘어올 수도 있는 상황이 벌어지자 교황은 친스페인 추기경들에게 굴복하여 프랑스와의동맹을 끊고 철저한 교권수호 전통적 교리수호의 입장으로 나가게 된다.

 

이에 따라 로마의 분위기는 예수회의 전통 스콜라주의는 큰 힘을 얻고, 린체이 아카데미나 갈릴레이는 위기에 몰리는 쪽으로 전개된 것이다.

 

교황은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갈릴레이를 새로운 철학의 상징적 대표로 단죄하여 자신의 수구로 돌아선 입장을 천명함으로써 교황권을 확립하려 했다. 즉 갈릴레이는 그 자신의 책으로 인해 단죄를 받기는 했지만이러한 복합적 상황에서 상징적인 인물로서 종교재판에 세워졌고 단죄를받았던 것이다.

 

이 시점에서 갈릴레이는 교황청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다른 도시로 피신하라는 권유를 받았지만, 그는 이를 거절하고 교회의 명령에 따라 로마로 향했다. 그의 신앙심은 이미 예수회 학교에 다닐 때부터 길러졌고,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과학적 사실에 관해서 틀린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그명령을 복종하지 않을 만큼 앝은 수준의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교황의호의에 대한 일말의 기대도 버리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종교재판이 얼마나 가혹한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친구들은 그에게 재판정에서 잘못을 인정하고 교황에게 목숨을 살려줄 것을 간청하라고 권유했다. 종교재판청의 추기경 중 하나였고 교황의 조카였던 프란체스코 바베리니는 처음부터 갈릴레이에게 호의적이었는데, 그는 갈릴레이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그에게 여러차례 잘못을 완전히 인정하라고 설득했다. 그는 이러한 친구들의 이 충고를 받아들여 자기 죄를 인정하고 교황의 자비를 구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갈릴레이는 목숨은 건졌다.

 

그러나 그는 참회를 상징하는 옷을 걸치고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체계를 공개적으로 부정해야 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가택 연금을 당한다는판결을 받았다.

 

나중에 그가 로마에서 재판을 받는 동안 고문을 당했고, 태양중심체계를 공개적으로 부정하는 자리에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Eppure simuove)라고 중얼거렸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그는 조금도 고문을 당하지않았고 그런 말을 할 만큼 어리석지도 않았다. 이 말은 1640년대에 그의추종자들, 예수회에 대항하여 새로운 철학을 되살리려는 사람들이 지어낸 말이다.

 

이러한 이야기로부터 우리는 갈릴레이가 교회에 대항하기는 커녕 교회에 복종했던 신앙심 깊은 사람이었으며, 태양중심체계의 투사도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이로 인해 수난을 당한 것은 너무 약삭빨랐거나 너무 순진했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 속에 새겨져 있는 갈릴레이의상은 실제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14강 라부아지에

 

17세기는 과학의 역사에서 매우 의미 깊은 시기이다. 특히 르네상스 특유의 정신적 흐름의 영향으로 이 시기는 천문학, 역학, 생리학에서 글자그대로 변혁을 맞이했다. 그런데 이 변혁에 특징적인 점이 있었다면, 그것은 관찰과 수학적인 계산을 통해서 근본적인 법칙에 도달할 수 있었던 또는 정확한 관찰을 통해서 새로운 원리를 발견할 수 있었던 분야에서만 변혁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천문학과 역학에서는 천체 현상이나 지구상의물체의 움직임을 정밀하게 관찰하고 관찰 결과를 수학적으로 다룸으로써아리스토텔레스 자연철학의 가르침과는 전혀 다른 근대적인 법칙이 나올수 있었다. 또한 생리학에서는 심장과 혈관의 작용에 대한 정확한 관찰을통해서 피의 순환에 바탕을 둔 근대적인 이론이 탄생했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볼 때 우리가 품을 수 있는 의문은 이와 같이 물리학, 생물학, 천문학에서 변혁이 일어났다면 과학의 다른 분야 특히 화학에서는 어떠했을까 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화학적인 현상, 즉 물질의 변화와관련한 분야에서는 근대 화학에서 찾아볼 수 있는 새로운 개념이나 이론은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연금술의 부흥, 공업적인 화학과 야금술의발달로 실용적인 화학 분야에서 많은 새로운 결과가 쌓였고, 또한 이에 부응하여 철학자들과 화학자들이 이러한 결과를 해석해줄 수 있는 설명틀을 만들려고 노력했지만 근본적인 변혁을 가져올 만한 이론은 나오지 않았다.

 

이 시기에 몇몇 근본적인 시도, 특히 원자론에 의지하여 화학 현상을 설명하려는 움직임이 있기는 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17세기 말 경에 보일의입자 철학으로 결실을 맺기는 했지만, 그의 이론은 한편으로는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과 다른 한편으로는 전통적인 아리스토텔레스의 물질 이론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화학에서의 근본적인 변혁을 가져올 만큼 강력하고 설득력 있는 것은 못되었다. 보일의 이론은 널리 퍼지기는 했지만 아직도 사변적인 것이 많았기 때문에 화학을 변혁하기에는 부족한 것이었던것이다. 화학 분야에서 천문학과 역학에 비견할 만한 변혁은 결국 이러한시도가 있은 지 100년이란 세월이 흐른 후인 18세기 말경에 가서야, 영국과 프랑스의 여러 화학자들 특히 프랑스의 라부아지에의 이론적인 노력에 힘입어 이룩될 수 있었다.

 

왜 화학에서는 다른 분야에 비해서 이토록 변혁이 지체되었는가? 그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화학 자체의 성격에서 찾을 수 있다. 화학의 중심연구 대상인 물질의 변화가 일어나는 원인은 우리의 감각적인 지각으로부터 직접 끌어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물질의 외적 변화는 감각을 통해서 지각할 수 있지만, 그 원인은 항상 사고 세계 속의 사변의 대상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화학에서의 관찰은 역학, 천문학, 생물학에서의 관찰과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이들 분야에서는 관찰한 것의 원인을 찾아내야 할 필요는 없다. 오직 관찰로부터얻은 데이터를 이용해서 현상을 정확하게 기술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투사체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다거나 행성 궤도가 타원이라는 역학과천문학 상의 발견은 관찰 결과를 수학적으로 기술한 것일 뿐이다. 피가 순환한다는 생리학상의 발견도 정밀한 해부와 정확한 관찰을 그대로 기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관찰한 것을 그대로 묘사한 것 자체가 생리학의 근본 원리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칸트는 학문을 분류하면서 화학은 물리학이나 수학보다는 아래에 놓인 것으로 분류했던 것이다.

 

그러나 화학에서는 물질이 불에 타면 재가 남는다는 것을 아무리 정확하게 기술한다 해도 새로운 발견이 나올 수 없다. 왜 재가 되는가, 물질 속에 무엇이 들어 있고 이것이 불을 만나면 어떤 변화를 겪기에 불꽃을 내놓으면서 재가 되는가를 설명해야만 근본 원리가 발견되는 것이다. 역학이나 천문학에서 갈릴레오나 케플러는 투사체가 왜 포물선을 그리고 행성이 왜 타원궤도를 그리며 달리는가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그러나 화학에서는 여전히 의 규명이 난제로 남아 있었고, 이로 인해서 화학 현상에 대한 설명은 형이상학의 우산을 벗어던지기 어려웠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르네상스 시대의 화학은 연금술, 형이상학적인 흔적이 잔뜩 묻은 물질이론들, 4원소설과 3원리설의 혼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후라부아지에가 등장하기 전까지의 18세기 화학은 플로기스톤 이론에 의지하여 혼돈으로부터 헤어나려 했고 처음에는 조금 성공하는 듯 했으나, 시간이 갈수록 자체 모순으로 인하여 비틀거릴 수밖에 없었다. 라부아지에의 위대성은 바로 이러한 혼돈 상태를 사변이 아니라 실험에 입각해서 내놓은 산화이론과 체계적인 명명법을 가지고 거의 단번에 정리했다는 것이다.

 

라부아지에(Antoine-Laurent Lavoisier, 1743-1891)는 그의 과학이론

 

에서뿐만 아니라 생활에서도 매우 근대적인 면모를 보여준 인물이다. 많은 시간을 연구에 쏟아넣고, 국가권력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고, 자신의 물질적 안락에 대해서도 무관심하지 않은 현대 과학자들은 18세기에살았던 라부아지에란 과학자의 삶과 만날 때 200년 이상의 시간간격을넘어서 자기들 동료 중의 한사람을 대하는 것같은 느낌을 받을 것이다.

 

라부아지에는 아버지를 본받아 법학을 공부했고, 가족의 친지인 게타르(Guettard)의 권유로 지질학을 연구하다 광석의 분석에 흥미를 느껴 화학으로 들어왔다. 화학에서 분석이란 종국에는 물질의 근원을 찾는 일로통한다. 당시에도 여전히 물질의 근원에 대한 탐구는 우리가 알고 있는100여개의 원소가 아니라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내려 오던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소에서 얼마 더 나아가지 않은 것이었다. 라부아지에는 새로운원소 개념을 내놓음으로써 4원소설을 무너뜨리는 데 크게 공헌했지만,그도 화학 연구를 시작했을 때는 4원소 즉 흙, , 공기, 불이 물질의 근본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는 이들 4원소 중에서 광물연구를하면서 매혹을 느꼈던 물과 17세기의 보일 이래 영국 과학자들의 연구무대였던 공기에 관심을 쏟았다.

 

초기에 라부아지에의 원소에 대한 탐구는 주로 사변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는데, 그 잠정적인 결과는 1772년 초에 발표된 짤막한 글원소에 관한 체계속에 들어 있다. 여기에서 라부아지에는 원소 특히물, 공기, 불은 고정되거나 자유로운 두가지 형상 중의 하나로 존재할 수있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서 물은 어떤 염 속에 결정수로 고정되어 있으며, 공기는 많은 물질 속에 고정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플로기스톤, 즉불의 물질” - 나중에 라부아지에의 공격으로 폐기될 운명이 되는 - 도 물질에 고정되어 있거나 자유로운 상태로 존재할 수 있다. 이 불의 물질은물과 공기를 고정 상태에서 자유로운 상태로 바꾸는 작용을 한다. 즉 고정되어 있는 물과 공기가 미세한 불의 물질과 결합하면 자유로운 상태가되는 것이다. 이 고정 상태와 자유상태, 다시 말하면 물질과 결합한 상태와 분리되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상태라는 생각은 분해한 후에 합성하여 다시 고정시키는 라부아지에의 실험방식을 결정했으며, 그의 새 연소이론을 낳는 바탕이 되었다.

 

라부아지에의 최초의 본격적인 화학실험은 물과 흙의 변환 가능성을확인하는 실험이었다. 당시에 과학자들 중에는 물을 병 속에 넣고 오랫동안 끓이면 침전이 생성된다는 사실을 근거로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소설에서 가르치는 바와 같이 물이 흙으로 변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있었다. 라부아지에는 이를 확인하기 위해 정교한 실험장치를 고안했는데, 이 장치는 물을 끓이면 그 증기가 나선형 덮개에 응축되었다가 바닥으로 되돌아오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라부아지에는 우선 순수한 물을 준비하고 그것의 무게와 실험장치의 무게를 재었다. 그후 물을 장치에 붓고몇주일 동안 끓이자 장치의 바닥에는 고체 상태의 입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00여일 동안 끓인 후 라부아지에는 물이 들어 있는 실험장치 전체의 무게, 고체 입자의 무게, 물을 제거한 후의 실험장치의 무게를 측정했다. 전체 무게는 끓이기 전의 것과 거의 차이가 없었고, 실험장치의 무게는 끓이기 전보다 줄어들었으며, 여기서 줄어든 무게는 고체입자의 무게와 거의 비슷했다. 그러므로 고체입자, 즉 흙은 물이 변해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유리로 된 실험장치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었다. 이로부터 라부아지에는 물은 흙으로 변환하지 않는 근본물질일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여기서 우리가 크게 주목해야 할 점은 라부아지에가 무게의 측정이라는 정량적인 방법을 사용해서 그의 결론을 이끌어냈다는 점이다. 이 무게측정이란 방법은 그 후에 그가 수행한 공기에 관한 실험에 어김없이 적용되었으며, 또한 그에게 아주 큰 성공을 가져다 주었다. 라부아지에는 화학자들 중에서 처음으로 화학 현상을 규명하는 데 무게라는 개념을 무기로 사용함으로써 화학을 양적인 과학으로 만드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무게를 화학에 본격적으로 도입함으로써 화학을 양적인 것으로 만들었던것이다.

 

물에 대한 실험에서 무게라는 양을 다루는 훈련을 마친 라부아지에는이제 연소이론을 낳은 여러 실험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라부아지에가새로운 연소이론에 도달할 수 있는 도약의 발판을 마련해준 실험은 1772년의 인과 황의 연소실험이었다. 이 실험에서 그는 물질의 무게는 물질이타고 난 다음에 감소하지 않고 오히려 증가한다는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다. 이 사실은 이미 라부아지에 이전부터 여러 화학자들이 보고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무게의 증가가 화학의 변혁을 위해 어떤 의미를 지닌것인지 몰랐다. 그들은 당시에 화학에서 보편적 이론으로 여겨졌던 플로기스톤설에 너무 빠져 있었기 때문에 이 현상을 기존의 이론에 맞추려고만 했다. 플로기스톤 이론의 추종자들은 무게가 증가하는 이유를 물질이연소하면서 플로기스톤은 빠져나오지만 그것이 음의 무게를 가지고 있기때문이라는 식으로 설명하기도 했다.

 

플로기스톤 이론은 독일의 의사이자 화학자 슈탈(Georg Ernst Stahl,1660-1734)이 만들어낸 것이다. 이 이론은 현대 화학의 관점에서 보면 한마디로 거꾸로 된 이론이다. 이 이론은 물질이 타서 불이 생기는 이유를그 속에서 플로기스톤이라는 연소를 일으키는 원리가 빠져나가는 것으로설명했기 때문이다.

 

플로기스톤 이론은 파라켈수스의 3원리설에서 발전해 나왔다. 3원리설에 의하면 물질의 모든 성질은 가연성을 나타내는 황, 유동성과 휘발성을 나타내는 수은 그리고 고체성을 나타내는 염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이론에서는 물질이 타는 연소현상을 물질 속의 가연성 원리인 황이 그 물질로부터 분리되어 나오면서 일어나는 것으로 보았다. 슈탈은 가연성 원리에다 플로기스톤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이 플로기스톤의 결합과 분리에 바탕을 둔 연소이론을 만들었다.

 

플로기스톤 이론에 따르면 석탄이나 나무가 불에 잘 타는 이유는 그 속에 플로기스톤이 많이 포함되어 있고, 이것이 물질이 탈 때 그 물질로부터 빠져나오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플로기스톤 이론은 연소만이 아니라 금속의 하소(calcination) - 금속이 높은 온도에서 산소와 반응하는 현상. 쇠가 녹스는 것도 하소의 일종이다 - 도 그와 같이 금속에서 플로기스톤이 빠져나오는 것으로 설명했다. 이 이론은 또한 광석을 숯불로 가열해서 금속을 얻는 제련과정도 설명해 주었다. 즉 숯이 탈 때 빠져나온 플로기스톤이 광석과 결합함으로써 금속이 생성된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현재 나무가 타거나 쇠가 녹스는 것은 나무나 쇠가 산소와 결합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연소나 하소가 물질 속의 무언가가 빠져나감으로써 이루어진다는 설명이 아주 이상하게 보일지 모른다. 그렇지만 일상경험에 비추어 보면 나무나 석탄이 타고나면 원래의 물질은 거의 다 없어지고 재만 남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연소때에 무언가가 빠져나간다는 생각을 당시의 학자들은 별 의심없이 받아들였던 것이다.

 

플로기스톤 이론은 또한 모든 연소나 하소 현상을 적어도 정합적으로는 설명해 주었다. 혼돈 속에서 방황하던 18세기 화학자들에게 이러한 설명틀은 일종의 구세주처럼 받아들여졌다. 플로기스톤 이론에 힘입어 화학은 연금술의 신비적인 숲을 탈출할 수도 있었다. 이제 화학자들은 많은화학 현상을 질적으로는 멋지게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을 얻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이론은 18세기 말까지 물질의 변화를 설명하는 훌륭한 설명틀의 기능을 했지만, 결국은 화학의 변혁을 가로막는 질곡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많은 훌륭한 화학 연구자들이 이 플로기스톤 이론에 얽매여서 자신이 실험에서 얻은 발견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는 일들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가장 애석한 널리 알려진 예가 바로 프리스틀리인데, 그는 산소를분리하고도 그것이 산소라는 것을 규명하지 못하고 플로기스톤 없는 공기라는 희한한 이름으로 그것을 불렀던 것이다.

 

라부아지에는 1772년의 실험과 발견을 통하여, 화학에 발을 들여놓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플로기스톤이라는 질곡을 화학의 핵심으로부터 벗겨내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는 1774년에 황과 인의 연소 실험을 정밀하게반복한 후 공기나 공기의 어떤 부분이 그 물질에 흡수되기 때문에 무게증가 현상이 나타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는 사이에 라부아지에는 파리를 방문한 프리스틀리로부터 수은의 금속재(산화 제2수은)를 렌즈로 가열하면 수은과 좋은 공기가 생성되는 실험 결과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라부아지에는 즉시 이 공기가 바로 무게를 증가시키는 원인이라 생각하고 이 좋은 공기를 분리하는 실험에 착수했다. 그리고 분리한 공기를다시 인이나 금속 등에 흡수시키는 실험을 통하여 자기의 생각이 옳다는것을 확인했다. 다시 말하면 실험을 통해 이 기체를 분해했다가 다시 고정시키는 과정을 수행했다는 것이다.

 

사실 라부아지에의 실험은 독창적인 것이라고는 거의 없었다. 그의 실험은 대부분 다른 사람들이 이미 수행한 것의 반복이었다. 특히 그는 프리스틀리의 실험으로부터 많은 영감을 받았는데, 실험적인 발견만을 가지고 비교한다면 라부아지에는 프리스틀리의 어깨는커녕 발목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프리스틀리는 데카르트적 전통을 따르는 라부아지에와 달리 영국적 전통의 폭넓은 교양인이었지 정교한 화학자는 아니었다. 그는 물질의 변화를 철저하게 합리적으로 설명하려는 무미건조한시도에 매료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프리스틀리는 산소를 발견했지만 새로운 연소이론이나 산화이론으로 나아가지는 못했다. 그는 1774년에 수은의 금속재를 가열하는실험을 통해 연소를 돕는 공기를 얻었고, 이것이 호흡에도 좋다는 사실을확인했다. 이 공기는 산소였는데, 플로기스톤 이론에서 여전히 벗어나지못했던 프리스틀리는 이것을 플로기스톤이 없는 공기 - 그렇기 때문에 다른 물체로부터 플로기스톤이 방출되는 것을 돕는 - 라고 불렀다. 그는 연소를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전제를 마련해 놓고도 옛 질곡에 갇혀 화학을 변혁할 수 있는 기회를 라부아지에에게 넘긴 것이다.

 

라부아지에는 연소와 하소가 일어날 때 흡수되는 프리스틀리의 기체를 처음에는 공기의 가장 순수한 부분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을 산소라고 명명한 것은 1776년의 일이다. 당시에 그는 화약의 원료인 질산 칼륨을 연구하고 있었다. 그런데 연구 중에 이것을 분해하면 공기의 순수한부분과 산화 질소가 나오며 이 두 기체를 물에 녹이면 질산이 생성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이 연구를 다른 산을 대상으로 확장했는데, 이때 탄산, 황산, 인산 등의 산에도 공기의 순수한 부분이 포함되어 있다는사실을 발견했다. 그 후에 라부아지에는 이 기체를 산을 만드는 원소라는뜻을 가진 산소라고 명명했던 것이다.

 

산소가 물질이 연소할 때 고정되고, 고정된 산소는 열을 가하면 자유롭게 될 수 있다는 실험 결과로부터 라부아지에는 산소의 결합과 분리에 바탕을 둔 연소 이론을 만들어냈다. 이 이론은 그후 산화 이론으로 확장되어 18세기의 화학을 지배했던 플로기스톤 이론을 몰아냄으로써 근대화학의 확립에 커다란 공헌을 했다. 과학사학자 길리스피의 말을 빌면 화학혁명은 라부아지에의 연소 개념을 모든 화학 반응으로 확장한 것이었다.

 

사실 당시에 화학 반응이란 물질의 연소나 하소라는 범위를 거의 넘지 못했다. 연금술사나 야금에서 수행되었던 화학적인 작업은 대부분 태우거나 열을 가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 때 일어나는 변화를 설명하는 이론은 거의 모든 화학 반응을 설명해 주는 이론의 자리를 차지할 자격이 있었던 것이다.

 

라부아지에의 연소 이론은 물질의 결합과 분리라는 화학 현상에 바탕을 둔 것이고, 정량적인 분석을 통해 확립된 것이다. 이제 그의 이론의 성공에 힘입어 화학은 근대과학의 대열에 합류할 수 있는 준비를 완료했고,그 대상은 여러 가지 성질이 아니라 물질의 결합과 분리, 즉 화학 반응이되었다. 그리고 이제 화학자들은 결합하고 분리될 때 얼마나 많은 양이 나오고 들어가는지 양을 측정하게 되었다.

 

또 한가지 라부아지에 이론의 성공으로 인한 중요한 변화 중의 하나는원소와 화합물이란 개념이 명확해졌다는 것이다. 더 이상 분리가 일어나지 않는 물질, 즉 분해되지 않는 것이 원소로 자리잡은 것이다. 반면에 화합물은 분해되는 물질이다. 그는 오랫동안 원소로 여겨져 왔던 물도 분해될 수 있음을 보임으로써 물로부터 원소의 지위를 빼앗아 버렸다. 그는 물을 뜨거운 총신을 통과하게 함으로써 수소를 분리했고, 수소를 태움으로써 다시 물로 결합시켰던 것이다.

 

화학 현상이 결합과 분리에 바탕을 둔 것이라는 사실의 확립은 또한 화합물의 명명 방식을 근대적인 것으로 바꾸었다. 라부아지에는 단순한 화합물의 이름을 분리되는 두 원소 각각의 이름을 합쳐서 만드는 새로운 명명법을 도입했다. 이제 원소의 이름만 가지고도 많은 화합물의 이름을 붙일 수 있게 된 것이다. 물은 수소화 산소, 고정공기는 산화 탄소, 비트리올(황산)은 산화 황 등으로.

 

라부아지에의 산화 이론이 성공함으로써 화학은 역학이나 천문학에서와 같은 변혁을 이룩할 수 있었다. 이 변혁은 물질 자체와 물질의 변화를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해 주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물질로부터 유기체적, “신비적인 색채를 제거함으로써 인간에게 다른 측면에서의 빈곤을 가져왔다. 그러나 합리적인 이해란 무엇인가? 그 결과는 설명틀의 단일화, 자연의 대상화, 자연의 무생물화가 아닌가? 물질의변화란 살아 있는 자연의 생성과 소멸과 변화의 일부가 아니라, 어떤 생명없는 물질이 다른 생명 없는 물질로 바뀌는 것일 뿐이다.

 

오늘날 화학자에게 물이 무엇인가 하고 물으면 그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수소 원자 두 개와 산소 원자 한 개가 결합해서 이루어진 물질로 분자식은 H2O이고, 끓는점 섭씨 100, 어는점 섭씨 0, 분자량 18의 물질이라고. 여기서 물은 구성 원자와 숫자로 해체된 물질로만 여겨질 뿐이다.

 

화학자들에게 물은 그들 자신으로부터 명확하게 분리된 하나의 대상일뿐이다. 그들은 물이라는 현상을 그들이 만든 구조, 모델, 체계라는 틀을가지고 바라볼 뿐이다. 여기에 들어 맞지 않는 것은 모두 제거된다. 양적으로 물은 분자량, 끓는점, 어는점, 점성, 표면장력 등으로 기술될 뿐이고,질적으로는 모든 성질이 분자 구조에 기인한 것으로 설명된다. 이들에게는 괴테가 다음과 같이 기술한 물은 전혀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다. 이 시에서와 같이 물이 지닌 또 다른 중요한 특성을 미적인 시각에서 보는 것은과학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의 혼은 물과 같다.

 

하늘로부터 와서 하늘로 올라가고.

 

그리고 다시 땅으로 내려와야 한다.

 

영원히 바뀌면서.

 

높고 가파른 바위벽으로부터는 맑은 물줄기가 흐른다.

 

그리고 그것은 평평한 바위에서 구름처럼 예쁘게 흩어진다.

 

...인간의 혼은 정말 얼마나 물과 닮았는가!

 

인간의 운명은 또한 얼마나 바람과 닮았는가!

 

괴테는 근대과학에서 자연을 외부의 대상으로 보고 그것을 파헤쳐 들어가는 방식에 대해 인간이 자연의 근원현상(Urphänomen)을 규명해 들어가면 언젠가는 화가 닥치리라고 우려한 바 있는데, 물질과 물질 변화의합리적, 체계적 접근이라는 라부아지에의 업적은 바로 이 근원현상을 규명하는 길을 열어 놓았다. 근원현상의 규명으로 인간의 물질에 대한 지식이 대단히 풍부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럼으로써 또한 괴테의 우려는 더욱 현실로 나타났다. 현재 우리가 겪는 인간과 자연 사이의 갈등의근원은 과연 어디에 있겠는가?

 

화학의 근본적인 변혁의 길을 열은 라부아지에의 개인적인 생애는 한사람의 조용한 과학자의 그것은 아니었다. 그의 생애는 여러 가지 굴곡을지닌 것이었는데, 우선 그는 세금 징수를 대행하는 일을 해서 생계를 꾸려나갔고, 정부의 여러 가지 커다란 용역사업을 수행하여 돈을 벌고 지위를 얻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프랑스 혁명 후 그는 단두대에서 처형당함으로써 생애를 마감하고 말았다. 죽음을 맞기 전 그는 자신의 생애를 회고하면서 담담하게 사형을 당했다. 그는 죽기 전에 이러한 말을 남겼던것이다. “나는 충분히 길고, 특히 행복한 삶을 살았다. 나는 나에 대한 사람들의 추모가 약간의 애도와 약간의 경외를 지닌 것이 되리라고 믿는다.

 

더 이상 무엇을 원할 수 있겠는가? 내가 얽혀들어간 이 상황은 나에게 아마 늙은이로서의 불편함을 겪지 않도록 해줄지도 모른다. 나는 늙은이로죽지 않을 것이고, 나는 이것 또한 나에게 주어진 축복으로 생각한다.”이 말은 라부아지에가 179457일 그가 단두대에서 처형당할 것을명하는 재판관의 판결이 내려지고 나서 몇시간 후 한 말이다. 그가 이렇게 처형당하게 되는 이유는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전 구체제 왕정을 위한 세금 징수관으로 일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세금 징수를 통해 민중들을 괴롭혔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겨우 50이었으니 프랑스의 많은 과학자들은 한편으로는 위대한 과학자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것을 매우 안타까와했다. 그러나 라부아지에 자신은 50이란 나이가살 만큼 산 것이고 그 동안 과학적으로 다른 사람이 따라올 수 없을 만한업적을 냈으니 이제 죽어도 한이 없다는 일종의 최후 진술을 한 셈이다.

 

그는 살아 생전에 자신의 업적에 대한 칭송을 이미 거의 향유해버렸다.

 

많은 다른 과학자들, 예를 들어서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멘델 등은 죽은다음에야 그들의 과학적 업적이 널리 인정을 받았고, 살아 있을 동안에는크게 주목받지 못했지만 라부아지에는 과학자로서의 영광도 살아 있는동안 다 누렸으니 여한이 없다는 말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라부아지에의 죽음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면 괴테의 말과 같이자연을 깊숙이 파고들어 근원적인 것을 캐려 한 결과 화를 입었다는 해석을 내릴 수도 있다. 그는 아주 다양한 실험의 방법을 동원하여 자연을 주물렀던 것이다. 렌즈로 태우고, 물을 분해하고, 분해한 물을 다시 붙여서물로 만들고, 많은 물질들을 쪼개어서 더 이상 나뉘어지지 않는 원소로서분리해낸 것이 모두 자연에 대해 너무 깊숙이 개입한 것으로 볼 수 있는것이다. 이것이 그에게 죽음을 가지고 왔다면 지나친 해석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그의 죽음 후 200년이 지난 지금 그가 기초를 놓은화학이 발달한 결과 지구가 처하게 된 운명을 보면 괴테의 말처럼 라부아지에와 그의 후배들이 이룩한 일이 결국 화를 자초했다는 해석이 타당한것처럼 보인다.

 

현재 지구는 온갖 화학물질로 뒤덮여 있고, 이것은 오존층을 파괴하고,지구온난화를 일으키고, 환경호르몬으로 작용하여 생물체의 자연적인 생식 질서를 교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지구상의 인간의 파멸, 생물체에의 커다란 재앙으로 나타날 것이라는 점은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이를 극복하는 데에 온갖 노력을경주해야 하는데도 그 노력보다는 오히려 재앙을 앞당기는 일에 더 열심인 것이 현실이다. 유전자를 파헤치고, 소립자를 더욱 더 깊이 파고들어가려는 연구, 나노기술을 통해 극히 미세한 기계를 만들어 물질과 생물을조작하려는 일들에 엄청난 자본과 인력을 동원하고 있는 것이 우리 현실이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라부아지에의 죽음에서 과학으로 인한 인류의 죽음의 전주곡을 볼 수도 있다는 조금은 과장되지만 약간의 진실도 포함된 결론을 내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죽었지만 그의 발견은 화학을 변혁시켰다. 그리고 그는 비극적으로 생애를 마감했다. 그의 후손들은 그의 죽음의 의미는 잊어버리고 그의발견을 계승했다. 그리고 조금도 의도하지 않았지만 이제 그의 죽음마저과학기술로 인한 인류 전체의 파멸이라는 형태로 계승하려하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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