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과11,12

카테고리 없음 2013. 7. 12. 21:05

11강 현대과학기술. 비판적 전망

 

독일의 작가 그림 형제의 동화 중에 금고기와 어부 이야기가 있다. 처음에 쓰레기통 같은 움막에서 살던 어부의 아내는 집을 원하고, 집이 생기니까 대궐을 원하고, 다음에는 왕의 자리에 오르고 싶어하고, 그것도 모자라 결국은 황제가 되기를 원한다. 금고기는 이 모든 소원을 들어준다. 그러나 어부의 아내는 황제가 된 것으로도 만족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어부의 아내는 금고기에게 신과 같은존재가 되어 물질세계뿐만 아니라 정신세계까지도 모두 지배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한다. 그러나바로 이 무엄함때문에 어부와 아내는 모든 것을 잃고 결국 처음과 같은 가난뱅이 신세로 되돌아가고 만다.

 

우리 시대의 컴퓨터와 정보기술의 확산 추세나 유전공학 기술을 보면 그림 동화에 나오는 어부와그의 아내가 바로 현 시대의 인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 근대과학이 성립하고 과학의 뒷받침을 받는 기술이 사회를 움직이는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은 이래 인간은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신과 같이 될 수 있고 그렇게 되겠다는 희망을 품어 온 것 같다. 그리고 이제이 희망은 물질을 분해하거나 융합하여 마음대로 에너지를 얻고, 가상공간 속에서 모든 가능한 상황을 창조하고, 생명체까지도 멋대로 조작할 수 있게 된 오늘날 바야흐로 실현 단계에 들어선 것처럼보인다.

 

인간이 신처럼 되어 신 노릇을 해보겠다는 욕망은 인간의 근원적 욕망이었던 것 같다. 그렇기에그리스 신화에서는 이카로스가 자기 아버지의 기술적인 발명품을 사용하여 하늘을 날아보려 했고,중국의 진시황은 불로장생의 영약을 얻어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사람들은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생각이 무엄한것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이는 신화의 결말이 이카로스가 결국 처음에 자기가 있던 땅으로 추락해버리고, 기술로 상징되는 불을 훔쳤던 프로메테우스는 영원한 벌을 받는 것으로 끝나는 것에서 드러난다. 그리스인들이 근대과학에 필적할 만한 자연인식 체계를 만들어냈지만 그것을 기술과 결합하여 산업화로 나아가지 않았던 것은 그들이 바로 그러한 균형감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기술은 자연을 기만하는 행위라고 말한 것에서도 우리는 당시 그리스인들의 기술에 대한 태도를 엿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만들어낸 많은 기발한 기계장치들이 신기한 장남감 정도에 머무르고 말았을 것이다.

 

중국의 현자들이 기술을 대했던 태도도 아리스토텔레스 못지 않았던 것 같다. 장자가 약은 꾀를가지고 만든 기술은 신묘한 천성을 제멋대로 흥분시켜 결국 도를 얻지 못하게 만든다고 말한 것을보면 중국의 현자들도 기술의 위험을 통찰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근대 이래 인간은 이러한 균형 감각을 상실했다 (또는 스스로 내던지고 말았다).

 

근대과학이 성립할 당시의 서양인들의 균형감각 상실을 대표하는 사람은 프랜시스 베이컨이다.

 

그의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유명한 말과 과학기술을 통해 아담 이래 잃어버린 에덴동산을 되찾는다는 발상은 이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그의 원대한 계획은 자연에 대한 지식, 즉 자연 위에 군림하는힘의 형태인 지식을 통해서 자연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오만한상태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베이컨의 생각은 그후의 많은 과학기술자들에게서 조금씩 형태를 달리하기는 했지만 계속 재생산되며이어져왔다. 공학자나 응용연구자들은 말할것도 없고 실생활과는 전혀 관계없을 것 같은 기초 연구를 하는 과학자들조차도 왜 그런 연구를 하느냐고 물으면 그들은 거의 한결같이 나의 연구가 언젠가는 인류의 복지를 위해서 사용될 것임을 믿기 때문에라고 대답한다. 여기서 우리는 베이컨의 정신이수백년 후 이들의 입을 통해서 되살아남을 본다.

 

베이컨에게는 모든 것의 중심이 인간이었고, 인간 이외의 모든 것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보기에는 인간을 제외한 나머지 것들은 모두 인간을 위한 기술적인 수단이 될 수있다. 이러한 생각은 칸트를 거쳐서 현재까지도 자연과 인간에 대한 지배적인 생각으로 남아 있다.

 

칸트의 명제는 인간은 인간 그 자체로서 가치있는 것으로 결코 수단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인데,그의 명제는 복제 양 돌리의 등장 이후에 종종 들을 수 있는 인간복제 반대 논거 - 식물과 동물을 조작하고 복제하는 것은 인간을 위해서 유용하기 때문에 허용하고 지원해야 하지만, 인간 복제는 인간존엄성을 해칠 수 있으므로 절대 허용되어서는 안된다 - 에서 그대로 나타난다.

 

베이컨이나 칸트에게는 인간이 모든 것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인간이 과학기술의 대상으로까지 전락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인간도 데카르트의 철학에서는 대상화된다. 물론 데카르트는 정신과 육체를 구분하여 육체만을 시계장치처럼 움직이는 기계로 대상화했다. 그에게 인간의 육체란 다른 기계와 마찬가지로 근대 역학의 원리에 고스란히 복종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정신이란 과학기술로 파악할 수 없고 그러므로 인간의 능력으로는 건드릴 수 없는 것으로 남겨 놓았다.

 

데카르트의 정신과 육체의 이분법은 최근까지도 그대로 지켜져 왔다. 그러나 분자생물학이 발달하고 뇌신경세포 속의 화학작용에 관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이를 인공지능에 응용하려는 연구가 급속히 부각되면서 정신과 육체의 이분도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인간의 성격, , 행동 등이 모두 유전자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유전자 결정론이나 행복, 슬픔, 기쁨, 감격 같은 인간의 감정 변화를 모두 뇌신경세포 속의 화학 변화로 설명할 수 있다는 극도의 환원주의적 접근은 정신과 육체의 구분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복제 양이 나타났을 때 많은 사람들이 히틀러나 아인슈타인이 그대로복제될 수 있다는 생각을 별 의심 없이 그대로 받아들였는데, 이는 일반인들도 알게모르게 유전자결정론에 상당히 침윤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유전자만 같으면 두 사람이 동일하다는 생각을받아들이는 것은 인간의 모든 것이 유전자로 환원될 수 있고 유전자만이 중요하다는 극도의 환원주의를 인정하는 것이다.

 

정신과 육체의 구분이 무너지고 정신현상까지도 물질로 환원하여 설명하는 것이 가능해진다는 것은 인간이 육체와 뇌를 포함한 생명체 전체를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가 되면 유전자 복제와 같은 기술은 아주 초보적인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이때는 어떤 유전자 표본을 놓고 그것과 똑같은 복제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유전자를 변형하고 신경세포를 다른 기계 장치로 바꾸어서 맞춤인간이나 싸이보그를 만드는 것이 최고의 기술로 여겨질 것이다.

 

현대에 들어와서 인간은 획기적인 기술이 나올 때마다 그것이 유토피아를 가져다주지 않을까, 베이컨식으로 표현하면 잃어버린 낙원을 되찾아주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인간은 이러한 기술로써 신적인 존재에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었던 것이다. 핵분열의평화적 이용계획이 나왔을 때의 열광, 현재 불고 있는 정보화 열풍, 휴먼게놈 계획이나 생명체 조작에 대해 과학자나 일반인들이 거는 기대는 모두 이러한 희망의 표출이다.

 

핵기술은 인간의 물질 조작, 다시 말하면 인간이 물질적인 자연에 가하는 폭력이 극단에까지 이른것이다. 핵기술이 나오기 전까지 인간은 자연의 외부만을 건드렸다. 아무리 깊이 들어가봐야 분자수준을 넘지 못했다. 기껏해야 분자나 원자들을 서로 결합시켰다가 분리하는 정도에서 머물렀을 뿐이다. 자연의 가장 내밀한 원자 내부까지는 인간의 손이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핵분열 기술이 등장하면서 물질적 자연은 완전히 발가벗겨지고 말았다.

 

핵기술은 원자핵이라는, 자연의 가장 미세한 부분까지도 으깨어버림으로써 자연을 철저하게 짓밟는다. 이 기술을 사용함으로써 인간은 자연을 짓밟는 행위를 아주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는 오만한 마음을 지니게 된다. 자연의 가장 내밀한 곳을 희롱의 대상으로 삼는 마당에 그 밖의 것을 마음대로 주무르는 데 무슨 거리낌이 있겠는가? 이러한 마음은 인간을 짓밟는 것도 자연스러운행위라는 더욱 오만한 생각을 갖게 만든다. 핵기술은 결국 전기 생산에서 그치지 않고 핵무기 생산으로 나아가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핵기술의 최초 개발자들 중 한 사람인 알빈 와인버그(Alvin Weinberg)는 핵발전을 파우스트적거래”(faustian bargain)라고 표현했다. 핵발전이 우리에게 큰 풍요를 약속하기 때문에 그 대가로 우리는 메피스토펠레스라는 악마에게 우리의 본질적인 것을 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핵기술은 악마만이 완벽하게 다룰 수 있는 기술이다. 인간은 이 기술에 가까이 다가갈 수 없다. ‘신묘한 천성을 내주어야만 조금 다가갈 수 있도록 허용되는 것이다. 핵기술은 대장장이가 쇠를 달구어 모루에 쳐서연장을 만들 듯이 우리 인간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기술이 아니다. 핵을 다룰 때 인간은 끊임없이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연장이 제대로 만들어졌는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는 것과 같은 행동은철저하게 금기사항이다. 만일 이 금기사항을 깨고 거리두기를 무시하면 그때는 그 벌로서 죽음이 덮쳐온다.

 

1999년 가을 일본 도카이무라 핵연료 공장의 임계사고나 체르노빌 사고, 후쿠시마 사고 등은 바로 거리두기라는 금기를 무시한 결과였다. 이 사고로 이미 유명을 달리한 두 사람의 기술자는 본능적으로 거리두기를 싫어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들은 자기들이 다루는 대상을 직접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보기를 원했는지 모른다. 이들이 그렇게 행동한 것은 단지 호기심이나 안전불감증 때문이었을것이라는 식의 설명은 지극히 피상적인 것이다. 좀더 근원적인 것이 그들을 움직였을 것이다. 내가참여하는 이 기술, 내가 만드는 이 물건을 진정으로 나의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근원적인 생명의 욕구가 그들을 죽음까지도 감수하게 만들었을지 모른다고 말한다면 너무 비약하는 것일까? 단순한 실수, 안전규정을 무시한 행동 때문에 그들이 죽음을 맞았다는 설명은 기술을 이용해서 물건을 만드는장인들의 근원적인 갈구를 모독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핵기술은 본질적으로 반생명적인 것이기에 그속에서 생명적인 것을 찾아보려 했던 두 기술자는 결국 목숨을 바치고 말았다.

 

물질적 자연의 가장 내밀한 곳을 마음대로 희롱할 수 있게 된 인간은 그후 또 하나의 정복 대상인 생명적 자연의 내부세계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물질적 자연에 대한 접근에서와 마찬가지로 생명적 자연에의 접근방식도 환원주의가 주류를 이룬다. 물질은 원자 덩어리이고 그것의 성질은 원자들의 배열과 움직임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 물질적 자연을 보는 환원주의적 시각이었다. 여기서는예를들어 물이라는 물체의 성질 중에서 투명하고 흘러내리고 비로 떨어지거나 이슬로 맺히는 등의미적인 면은 완전히 배제되고 그 구성 성분과 끓는점, 어는점, 점성, 표면장력 등 측정 가능한 숫자들만이 의미를 지닌다.

 

마찬가지로 환원주의의 시각에서 생명체를 볼 때는 그것의 문화적, 미학적 양태는 고려되지 않는다. 오직 이 생명체가 지닌 유전자의 개수, 길이, 작용방식, 그것을 구성하는 DNA의 염기서열, 뇌 속신경세포의 연결방식과 전자전달 방식만이 문제된다. 그리고 이러한 연구로부터 얻어진 결과는 필연적으로 실험실 규모를 벗어나 산업적인 규모를 지닌 생명체 조작으로 나아간다. 동물과 식물 유전자의 변형, 변형 유전자를 지닌 동물의 복제, 이러한 복제 동물의 대량 생산, 인간 유전자의 조작, 인간 복제, 장기 공급체로서의 복제 인간 양산으로.

 

생명적 자연에서는 유전자를 잘게 잘랐다가 다시 이어붙여서 새로운 변형 유전자를 만드는 것이물질적 자연에서 원자핵을 쪼개고 다시 결합하는 것에 해당한다. 이 기술이 발휘되면 아주 초보적인경우에도 각 생명체의 자기 정체성은 의미를 잃고 만다. 현재 유전공학 기업체들이 의욕적으로 개발하고 있는 인간화된’ - 장기를 인간에 이식해도 거부반응을 일으키지 않도록 유전적으로 변형된 돼지는 얼마만큼이 돼지이고 얼마만큼이 인간이겠는가? 그리고 이 돼지의 심장을 이식받은 사람에게는 인간의 정체가 얼마만큼 남아 있는 것일까? 유전자 결정론에서는 유전자만으로 정체가 결정되므로 전체 유전자 중에서 돼지나 인간 유전자가 차지하는 비율을 계산해서 20%는 돼지, 80%는 인간 하는 식으로 답을 내겠지만.

 

정보공학은 머지않아 생명공학에게 그 자리를 내어줄 것이다. 생명공학이 정보공학을 제치고 우리의 관심과 우려의 중심에 설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것이 유전공학과 생식기술을 융합하여 생물종들 사이의 경계, 생물과 무생물 사이의 경계를 해체함으로써 생태계의 질서를 뒤흔들고, 인간과 인간 이외의 동물, 남성과 여성 사이의 경계를 불분명하게 만듦으로써 전통적인 인간상과 인간 정체성을 붕괴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생태계의 교란, 인간 정체성의 붕괴는 이미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독일의 과학자들은 유전적으로 변형된 유채꽃의 꿀과 꽃가루를 먹은 벌의 내장기관에서 유채꽃에 이식된 유전자를 몸에 지닌미생물을 발견했다. 이 과학자들은 식물에 이식된 유전자가 다른 동물 속으로 들어가서 그 동물의유전자의 일부가 될 수 있고, 그럼으로써 생태계의 유전적 질서가 교란될 가능성을 확인한 것이다.

 

미국의 어느 생명공학 회사는 동물과 인간의 유전자를 조합한 수정란을 만들고 이것을 분열시켜 특허를 내기도 했다. 만일 수정란이 자라서 하나의 개체가 된다면 인간과 동물의 잡종이 얻어지는 셈이다.

 

돼지의 심장을 인간화하는 작업도 진행중이었지만, 얼마 전 영국 과학자들은 그 작업을 일시 중단했다. 이들은 돼지의 심장을 인간에게 이식했을 때 거부반응을 유발하는 유전자를 제거하거나 약화시킴으로써 장기 이식용 심장을 대량으로 생산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다. 연구 책임자는 복제양 돌리를 만든 이언 윌머트 박사였는데, 그는 유전적으로 조작된 심장을 지닌 돼지를 만들어낸 다음 이것을 복제해서 인간화된 심장을 만들어내면, 이식용 심장을 기다리는 심장병환자 치료에 크게 기여할 수 있으리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들은 꿈을 잠시 접어둘 수밖에 없었는데, 이유는 인간에게 치명적인 돼지 바이러스가 돼지 심장과 함께 인체로 들어와서 생명에 위협을가할 수 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이와 같이 생명공학이 유발할 수 있는 심각한 문제가 여기저기에서 발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생명공학의 유용성을 열성적으로 전도하는 사람들은 수퍼작물과 수퍼가축이 등장하여 식량문제가해결될 것이고, 질병을 일으키는 유전자를 정상 유전자로 대치하는 유전자 치료와 유전적 노화기제의 완화 기술로 인간의 평균수명이 수십년 이상 늘어날 것이고, 유전적으로 인간화된동물 장기의대량 생산이나 수정란을 조작해서 얻은 인간 간세포를 이용한 장기 생산으로 이식용 장기부족 사태가 해결될 것이고, 멸종 위기에 처한 동물의 복구로 생태계 유전정보 감소가 억제될 것이라는 등의찬란한 미래를 그려 보여준다. 한국에서도 마리아 불임클리닉에서는 수년된 냉동 수정란을 가지고간세포를 만드는 데 성공했고, 어느 생명공학자는 백두산 호랑이를 복제하여 생태계로 되돌리겠다는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생명공학이 인류의 미래를 보장한다는 확신에 차서 아무런머뭇거림 없이 생명공학 시대를 향해 돌진하고 있다.

 

생명공학의 전도사들이 그리는 인류의 미래상은 이 기술이 자본의 강력한 힘을 등에 업고 일부의우려나 저항, 기술적인 어려움 등 여기저기 널려있는 암초를 피해 항진하게 되면 대체로 실현될 것이다. 물론 암초를 간단히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수퍼작물과 수퍼가축이 다른 저품질로 취급되는 작물과 가축을 모두 쓸어버리고 수퍼만이 재배되고 사육되는 농업을 관철시키면, 언젠가 이 수퍼를 모두 감염시킬 수 있는 박테리아가 나타났을 때는 모든 작물과 가축의 멸종이라는 재앙이 초래될수 있고, 인간이 백년을 훨씬 넘기며 살게 되면 인구.세대.노동.연금과 관련하여 예기치 못했던 복합적인 문제들이 발생할 수 있고, 동물 장기 이식은 인간을 부분적으로 동물화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동물에 서식하는 바이러스들을 인간에게 침투하여 퍼지게 함으로써 인간이 저항하지 못하는 아주새로운 질병을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의 간세포를 이용해서 장기를 만들어내는 일은 인간 수정란을 마음대로 조작하는 길을 열어줄 것이고, 이는 결국 인간 조작이라는 결과를 낳을 수도있다. 미국이나 영국의 보험회사에서 유전적 질병에 걸릴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을 차등적으로 대우하려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유전공학이 앞으로 매우 복잡한 사회문제를 발생시킬 수 있음을 보여준다.

 

생명공학 시술자들은 기술을 완벽의 수준으로 발전시키고, 세심하게 주의하고, 윤리적인 가이드라인을 잘 지키기만 하면 여러 가지 암초를 잘 비껴갈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문제가 그런 작은 기술적인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데 생명공학의 심각성이 있다. 생명공학은 머지않아 생명의 근원인 수정란 속의 유전자를 마음대로 조작해서 맞춤동물, 맞춤인간을 만들고야 말 것이고, 전자공학.정보공학.나노기술과 결합하여 인공물도 생명체도 아닌 사이보그적인 존재를 만들어내려 할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분자생물학자가 경고했듯이 유전자를 끊임없이 개량한 결과, 자연생식을 통해 탄생했기 때문에 낡은유전자를 지닌 인간과는 생식도 불가능한, 따라서 인간으로 보기 어려운수퍼 인간종이 등장할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뛰어난 지능도 없고, 병에도 잘 걸리고, 70년 정도 살면 흙으로 돌아가는 평범한인간이 설 자리는 과연 어디인가? 공상과학영화 <가타카>에서와 같이 이들은 이등인간군에 소속되어 평생 청소부로 일하면서 생을 마감해야만 하게 되는 것일까? 또는 자연적 인간보다 훨씬 월등한사이보그가 나타나면 모든 인간은 이들에 봉사하며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만일 일부 인공생명 연구자들이 주장하듯이 로봇이 인간의 자리를 이어받아 만물의 지배자로 등장하게 되면, 인류는 그야말로 사라질 운명에 처하는 것이 아닐까? 생명공학이 초래할 수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바로 이와 같은 인간 존재 자체의 부정과 제거일 것이다.

 

현대 생명공학은 인간에게 진화를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했다. 지금까지 생물의 진화는 자연의 품 안에서 진행되어 왔고, 자연은 아주 오랜 세월에 걸쳐서 그 속에서 살아가는 종들을 조금씩변형해 왔다. 그러는 가운데 자연에 제대로 적응해서 후손을 널리 퍼뜨린 종들은 생태적 순환질서속에서 번성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제 생명공학의 발달로 진화를 지배하는 힘은 자연으로부터 인간으로 넘어왔고, 인간은 이 힘을 휘둘러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유전적으로 새로운 생물체들을 만들어가고 있다. 그 결과는 자명하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새로운 생물체들은 생태계에 커다란 충격을줄 것이고, 생물종들 사이의 질서는 크게 교란될 것이다.

 

유전자 조작과 복제까지만 할 수 있어도 인간이 생명적 자연에서 신적인 존재에 도달했다고 볼 수있는데, 현대 과학기술의 욕망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생명체의 일부를 무생물로 대치하여 기계 생명체를 만드는 것까지도 꿈꾸고 있다. 이러한 꿈의 사도들은 기본적으로 인간이란 생명체를 불완전한 존재로 본다. 인간은 수명이 100년도 안되고, 컴퓨터만큼 계산이 빠르지도 기억능력이 뛰어나지도 않다. 이들은 인간의 노화작용이 밝혀지면 노화를 지배하는 유전자를 대체함으로써 수명을 크게연장할 수 있고, 또한 시간이 갈수록 닳아 없어지는 기관들을 새롭고 더 믿음직하게 작동하는 인공물로 대치하면 수백년 이상 수명을 늘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사도들은 두뇌의 작용이 밝혀지기만 하면 나노기술을 이용하여 두뇌 속에 수많은 극소형 전극을 연결하여 두뇌의 계산과 기억 용량을대형 컴퓨터 수준으로 확장할 수 있다고 본다.

 

이들의 꿈이 실현된다면 인간은 그야말로 완벽하게 신이 되는 셈이다. 현재의 인간 수명과 비교하면 거의 영원에 가까운 수백년 이상의 삶을 살고 게다가 두뇌의 능력마저 완벽에 가까운 존재를 신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지 않을까? 만일 이러한 기계 인간들이 등장하면 자연세계는 산업화 이래 겪었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엄청난 변화를 겪을 것이다. 그때는 아마 자연과 인공이 서로섞여 경계가 없어지는 상황이 벌어질 것이고 따라서 자연-인공의 구분은 무의미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계에서는 우리가 지금 가상현실이라 부르는 것도 실제 현실로 주어지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완벽한 창조자가 되는 셈이다.

 

인간이 신의 자리에 다가가는 도정에서 볼 때 현재 컴퓨터로 만들어내는 가상현실은 창조 연습에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컴퓨터의 도움으로 거의 모든 상황을 가상 공간 속에다 창조할 수있다. 그리고 그 상황을 관찰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것이 마치 실제인 양 체험하는 것도 가능하다. 주라기 시대의 공룡을 영화 속에 창조해 놓고 관찰하는 것뿐만 아니라, 전자 감응장비로 무장하면 공원 속에서 공룡에게 쫓기거나 공룡과 싸우는 것도 실제처럼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가상 창조는 어린아이부터 성인까지 수많은 사람을 매혹한다. 다마고치나 다른 사이버 애완동물은 가상 창조의 극히 초보적인 시작일 뿐, 앞으로 다른 더욱 더 매혹적인 창조물들이 연습용으로 계속 등장할것이다.

 

가상현실과 마찬가지로 인터넷이라는 전지구 통신망도 인간이 전능한 존재에 도달하려는 연습과정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인터넷은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전지구를 한눈에 파악하는 것을 가능하게한다. 그런데 지구 전체를 한눈에 파악하는 것은 지구 위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지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을 때만 가능하다. 인터넷은 인간에게 바로 그러한 능력을 제공한다. 우리는 인터넷을 통해세계 곳곳의 아름다운 곳으로 가볼 수도 있고, 많은 사람들의 사생활을 엿볼 수 있고, 조금 더 꾀를부리면 세계의 유명한 또는 비밀로 가득찬 기관 속에 침투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핵기술, 컴퓨터 시스템, 유전공학은 한편으로는 인간이 신적인 존재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 기술들은 다른 한편으로 인간을 원래 그가 출발한 지점보다 훨씬 더 비참한상태로 추락시킬 가능성을 숨기고 있다. 핵기술은 지구를 방사능으로 뒤덮을 수 있고, 전지구를 연결하는 컴퓨터 시스템은 일순간에 마비될 수 있고, 유전공학은 지구 생태계를 엄청나게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12강 과학 <체제> 밖의 과학

 

과학연구를 업으로 삼은, 소위 과학자라 불리는 사람들 중에서 자신의 활동에 대해 사회적 맥락 속에서 반성하고자 하는 사람은 스스로 험난한 길로 들어선 셈이다. 과학자들은, 그들이 과학연구체제의 구성원이 되어서 연구를 시작한 그 순간부터 진정한 의미에서의 독립성을 상실하고, 그 결과 반성적인 연구는 대단히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대학에서 활동하든 대학 밖의 연구소에서 활동하든, 순수하게 진리를 탐구하려 하든 인류에게 유용한 인공물을 만들어내려 하든 과학연구자들은 그들 자신만의 독자적인 공간 속에서 독립적인 활동을 할 수는 없게 되어 있다. 이들은 끊임없이 연구결과를 내놓아야 한다는 압력에 시달려야 하고, 연구를 수행하기 위해 끊임없이 연구비를 신청해야 하고, 연구결과나 연구신청서를 놓고 항시 동료연구자들이나 지원기관의 심사에 자신을 내맡겨야만한다.

 

이러한, 앞만 보고 달려가야 하는 체제 속에서는 반성의 기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다. 간혹 그러한 기회가 찾아오기도 하지만 어느 과학자가 이 기회를 진정으로 붙잡으려 하면 연구자로서의 그의장래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수도 있다. 그의 반성은 필연적으로 자신의 활동에 대한 반성뿐만 아니라 자신이 몸담은 기성 과학계의 관행에 대한 반성과 비판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에, 그는 동료과학자로부터 따돌림당하고, 연구비 신청에서 어려움을 겪고, 그리고 그 귀결로서 빈약한또는 주류과학계로부터 쓸모없다고 판정받는 연구결과를 내놓는 고통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것이다. 특히 연구경력이 얼마 되지 않은 소장 과학자들에게는 반성의 대가가 연구자로서의 생애를파괴할 정도로 심각할 수도 있다. 그가 대학이나 기업체와 맺은 계약은 더 이상 갱신되지 않을 것이고, 과학계에서 기피인물로 낙인찍힌 탓에, 또는 심사제도를 통해 과학계에서 인정받는 연구를 수행하거나 논문을 낼 수 없게 된 탓에 다른 곳에서 자리를 얻기도 대단히 어려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기성 과학계는 진정으로 반성하는 또는 반항하는 과학자 그 누구라도 그 경력을 파멸시킬 수 있는충분한 권력을 가지고 있다. 물론 과학계에서 무시당하지 않으면서도 과학연구활동에 대해 어느정도는 성공적으로 반성하고 비판하는 과학자도 존재하지만, 이들은 대부분 반성적 활동을 시작하기전에 오랫동안 기존 연구체제 속에서 활동하면서 명성을 쌓은 사람들이거나 기존 과학계의 관행을전면적으로 부정하지는 않는 사람들이다. 연구체제에 편입된 초기부터 비판적인 입장을 보이면서끝까지 그 체제에 남아 성공적인 위치에 도달한 과학자의 예는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과학자에게 사회적인 맥락 속에서의 반성이라는 행위는 연구자로서의 생애를 내건 커다란 결단을 요구하는 일이다.

 

과학자가 비판적인 입장을 가지고 활동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는 사회과학이나 인문학 분야에서 활동하는 학자들과 비교해보면 잘 드러난다. 이들 분야의 학자들 중에서는 대학이나 연구소에 몸담고 있으면서 사회적으로 비판적인 활동을 하거나 학문 또는 학문활동 자체에 대해 반성적인발언을 하는 사람들을 종종 만날 수 있다. 이들 중에는 또한 대학이나 연구소 밖에서도 비판적인 입장을 가지고 자신의 연구를 수행하는 사람이 상당수 있는데, 이는 이들 학문의 성격과 학문체제가이러한 독립적인 연구를 가능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사회과학자나 인문학자는 혼자서 주로 책과 씨름하며 사색을 통해서 연구하고, 연구결과도 동료 학자들만이 아니라 일반인까지도 포괄하는 광범한 독자층을 대상으로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대학에 몸담고 있는 어떤 인문학자가 대학이나 학계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급진적인 주장을 펴서 일자리를 잃었거나 기존 체제를 비판하고 스스로 자리를 버리고 떠난다고 해도, 이들의 연구활동이 조금 위축될수는 있겠지만 연구가 불가능해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이들 인문사회과학자들은 또한 학문을 배우기 시작할 때부터 다른 사람들의 이론이나 주장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도록 훈련받지 않았던가. 그러나 과학자들은 주로 이미 확립된 지식을 효율적으로 습득하고, 계산방법을 익히고, 실험 결과를 제대로 해석하고, 실험기기를 정확하게 다루는 방법만을 훈련받아왔지, 이론이나주장을 비판적으로 보는 훈련을 받은 것은 아니다.

 

과학자들은 확실한, 진리를 추구하기 때문에 모든 이론이나 연구결과를 비판적인 시각에서바라본다는 이야기가 종종 들리지만, 여기서 비판이란 말은 어떤 결과가 과연 충실한 실험을 바탕으로 얻어진 것인지, 어떤 이론이 적절한 실험적 수치와 올바른 계산법을 통해서 도출된 것인지를 엄밀하게 검토하는 행위를 말하는 것으로 사회적 맥락 속에서의 비판과 반성과는 조금도 관련이 없는것이다. 그리고 또 과학자들은 실험실에서 동료들과의 협동연구가 아니면 연구가 거의 불가능하고,설령 독립적으로 혼자 할 수 있는 연구라 하더라도 연구결과는 항상 동료 과학자만을 독자로 하는폐쇄적인 학술지에 낼 수밖에 없다. 그뿐만 아니라 연구의 결과로 인해 이들에게 돌아오는 책임이나비난의 무게는 인문사회과학자들의 그것보다 훨씬 큰 경우가 종종 있다. 원자폭탄이나 화학무기, 탈리도마이드 같이 인류에게 엄청난 손상을 입힌 예는 말할 것도 없고 과학자들에게는 사소하게 여겨지는 동물실험 같은 연구행위에 대해서도 비난이 쏟아질 수 있다.

 

생물학, 의학, 약학, 실험심리학 분야의 연구자들 중 상당수는 연구결과를 내기 위해 많은 동물을 괴롭히거나 죽일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 있다. 이들은 동물을 더 많이 괴롭히거나 죽일수록 더 많은연구결과를 내놓을 수 있다. 이러한 연구가 사회적으로 과연 의미있는 것인가라는 반성적인 질문을고려하지 않으면 많은 연구를 내놓는 것은 연구자의 업적을 높여주고 학계의 연구축적에 기여하는일이므로 비난받을 만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연구업적을 높이기 위해서 동물을 괴롭혀야만 한다는 것은 이들이 인문사회과학자들과 분명히 다른, 업적추구의 결과에 대해 그들보다 훨씬 엄중한비판을 당할 수 있는 위치에 놓여 있음을 보여준다.

 

대표적인 동물보호론자인 피터 싱어는 철학자나 역사학자는 자신의 업적을 쌓으려 한다 해야 종이낭비와 동료들을 지루하게 하는 것 이상의 해를 끼치지않지만, “동물실험이 포함된 업무에 종사하는 자들은 (동물들에게) 심한 아픔이나 장기적인 고통을 야기할 수있으며, “따라서 그들의 작업은훨씬 엄격한 필요성의 기준에 따라 행해져야 한다는 말로 동물실험을 비난한다. 물론 과학연구체제내의 관행에 젖어있는 과학자들은 이러한 비판에 대해서 무지하거나 알더라도 조금도 신경쓰지 않는 태도를 보일 것이다. 그렇지만 반성적인 과학자로서 연구체제 안에 남아있으려는 사람이라면 싱어와 같은 과학외부의 비판자들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고, 따라서 이들은 연구체제 안에서뿐만 아니라 밖으로부터 가해지는 고통을 감수해야 할지 모르는 처지에 놓이는 것이다.

 

반성적인 입장을 지키면서 과학연구를 수행하는 일이 이토록 어려운 것이기 때문에, 젊은 과학자로서 기존 과학계의 관행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 중에는 그래도 내부에 남아 개혁을 시도해보겠다는태도를 취하는 경우도 있지만 - 이들은 어쩔수없이 타협적인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다 - 과학연구체제로부터 떠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떠난 사람들도 두 부류로 갈라지는데, 일본의 시민과학자로서 대안적 노벨상이라 불리는 바른생활상을 수상한 타까기 진자부로가 이야기하듯 과학을 완전히버리고 다른 활동을 택하는 경우와 제도권내의 지위를 버리기는 했지만 자립적인 과학기술을 지향하는 경우가 있다.

 

과학자들이 연구체제를 떠나는 일은 한 국가 내에서 과학계가 사회적인 맥락을 고려한 과학연구를얼마나 용인하느냐에 좌우되기도 한다. 한국이나 일본의 경우와 같이 과학계가 대단히 경직되어 있고 연배에 따른 위계질서가 강하게 남아있는, 따라서 주류연구가 아닌 연구는 좀처럼 받아들여지지 않는 구조에서는 과학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러나 독일을 비롯한 북유럽 국가에서처럼 좀더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고 연구체제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부터 종신계약이 보장되는 구조나미국과 같이 매우 다양한 연구구조가 존재하는 곳에서는 체제 내부에서 비판적인 연구를 수행하는경우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물론 이들 나라에서도 비판적인 자세를 지닌 과학자는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경우에 따라서는 이들이 과학연구체제로부터 추방되는 일도 발생한다).

 

독일에는 소수이긴 하지만 주류 방사선학회에 대항하여 핵발전소로부터 방출되는 방사능의 피해에초점을 맞추어 연구하는 학자들이 결성한 방사능보호학회가 있고, 핵발전을 반대하는 생물학, 의학분야의 교수들이 설립한 방사능연구소도 있다. 그리고 다름슈타트 대학에서는 십여년 전 어느 물리학 교수의 주창으로 핵무기의 피해와 핵무기 폐기를 연구하는 연구그룹이 결성되었는데, 이 그룹은핵무기를 반대하는 국제 과학기술자 네트워크를 이끌어가고 있다. 네덜란드에서 과학상점 활동을지원하는 대학교수나 연구자들도 내부에서 반성적인 연구를 하는 과학자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 나라에서는 대학이나 연구소를 떠나는 경우에도 반성적으로 과학연구를 수행할 수 있는공간이 아주 좁지는 않다. 독립적으로 연구를 수행하는 상당수의 민간연구소에 들어가서 연구를 계속할 수도 있고, 시민단체와 연계해서 활동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에게는 기존의 과학계에서 독창적이라고 판정받는 연구결과를 내놓을 기회는 극히 적다. 이들이 하는 일은 아주 좁은 분야로 들어가서 독창적인실험을 조직하여 연구를 하거나 실험 결과를 계산을 통해서 독창적으로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주로 핵발전소, 환경호르몬, 독성 화학물질 같이 사회적으로 중요한 과학기술 문제에 대해서 넓은 시각에서 판단을 내리는 것이고, 따라서 이로부터는 폐쇄적인 학술지에 실릴만한 독창적인연구는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 독립적인 과학자들의 주요 독자는 과학기술자가 아니라 일반 시민이기 때문에 이들은 연구결과를 학술지에 발표할 필요도 거의 느끼지 않는다.

 

북유럽과 달리 일본이나 한국과 같이 과학연구체제가 경직되어 있고, 그렇다고 독립적인 연구기관도 몇 개 되지 않는 나라에서는 과학계를 떠나는 사람들 대부분은 과학을 완전히 버릴 수밖에 없을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극소수이긴 하지만 과학을 버리지 않고 자립적인 과학을 하려는 사람들은 어떤 길을 갈 수 있는 것일까? ‘시민과학자를 자처하는 타까기 진자부로 박사는 자신이 바로 이 극소수에 속한다고 말하는데, 그가 걸었던 길은 그의 자전적 기록인 <시민과학자로 살다>에서 조금 드러나듯이 그야말로 힘든 가시밭길이었던 것 같다. 그는 대학에 들어가서 핵분열이라는 경이적인 현상을 발견하기에 이른오토 한과 같이 물질의 비밀을 발견하는 작업에 매력을 느껴서 핵화학을 공부하고, 일본원자력사업이라는 회사에 들어가서 방사성 물질의 거동을 조사하는 연구에 참여하여 나름대로 열심히 핵화학 연구를 수행한다. 회사에서 몇 년 일한 후 기업의 부정직한이윤추구 논리에 실망하고 있던 차에 플루토늄을 발견한 글렌 시보그의 <초우라늄 원소>라는 책을읽은 그는 핵화학에 새로운 장을 써넣고야 말겠다고 가슴깊이 맹세하고, 본격적인 연구를 해보고자 회사를 떠나 토오꾜오대학 부속 원자핵연구소에 들어간다. 연구소에서 타까기는 꽤 흥미있는 연구결과를 내놓았고 스스로 결과에 대해 어느정도 만족도 하지만, “연구가 연구를 낳는 세계인 과학계에서 논문 중독이라고 할 수 있는 증상에 걸린 자신에 대한 자기반성을 통해 전환점을 찾던 중 토오꾜오 도립대에서 조교수 자리를 얻어 대학으로 옮겨간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간 지 3년 후 방사능의 위험을 연구하여 밝히기보다는 그러한 연구에 무관심하거나 감추려는 기성체제의 일부가 된 대학 안의 과학연구에 회의를 느끼고 결국 대학을 떠나고 만다. 이때부터 타까기는 자립적인 과학, ‘시민의 과학을 하기로 결심하고 고통이 따르는 길로 들어서게 된다.

 

타까기의 선택과정은 과학연구체제나 연구관행에 대해 실망을 느끼고 기성 과학계를 떠난 다른 여러 사람들과 유사한 점도 있지만 다른 점도 꽤 있는 것 같다. 기성 연구체제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인독립적 과학자로서 세계적으로 가장 큰 명성을 얻은 사람으로는 제임스 러브록을 들 수 있다. 러브록은 미국의 항공우주국(NASA)에서 일하기도 했지만 미량의 화합물을 검출하는 데 쓰이는 전자포획탐지기를 발명하여 상당한 액수의 로열티를 받을 수 있었기에 자신이 하고 싶은 연구를 마음대로할 수 있었다. 그는 대학이나 연구소를 중심으로 운영되고, 논문을 위한 논문, 연구를 위한 연구, 심사평가제도가 지배하는 기존 연구체제가 과학자의 창조성을 말살하고 진정한과학의 형성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기성 과학계의 관행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다.

 

러브록은 현대의 과학체제가 많은 젊은이를 끌어들이는 돈벌이 장소가 되었는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타락하기 쉬운 현재와 같은 구조를 바꾸어서 과학을 천직으로 여기는, “지구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를얻으려는 열망에 사로잡힌, 그러므로 금전적인 보상도 하찮게 여기는 소수의 사람만의 것으로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는 열정적으로 지구와 인류를 구할 수 있는 보다 깊은 이해를위한 독립적인과학연구를 수행하려 한다. 그러나 러브록과 같이 독립적인 과학자로서 실제로 실험을 하면서 깊은 지식을 추구하는 예는 아주 희귀한 것이다. 러브록은 근대과학의 방법을 통해 자연에 대한 깊은 이해에 도달하려는 노력을 매우 고귀한 것으로 여기고 있고, 타까기도 과학이 체제내화된 것에 대해불만이지 경이로운 현상인 핵분열발견이나 플루토늄 발견 자체에 대해서는 경탄의 자세를 보이는 등 근대과학의 자연탐구 방식에 대해서는 별로 의문을 던지지 않는다. 그러므로러브록이나 타까기는 모두 근대과학의 탐구방식은 인정하면서 과학과 에콜로지의 통합을 역설하거나 시민과학을 주창하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독립적인 연구기관에서 연구하는 과학자들이나과학상점 운영자들, 과학기술의 민주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에게서도 발견된다. 이들은 모두 과학이 거대화하고 시민을 소외시키고 과학자들이 전문성을 무기로 권력을 휘두르는 것을 비판하지만근대과학의 자연관, 자연탐구 방식을 근본적으로 거부하지는 않는 것이다.

 

기성 과학계를 떠난 과학자들 중에는 러브록이나 타까기와 달리 근대과학 자체에 대해서 의문을 던지는 사람들도 있다.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프리초프 카프라와 반다나 시바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카프라는 근대과학의 환원주의적 패러다임과는 다른 전일적인 패러다임을 가진 과학을 만들어내고자노력하고, 시바는 에코페미니즘의 시각에서 자연을 지배의 대상으로만 보는 기존의 도구주의적이고환원주의적인 과학이 아닌 생태적으로 건전하고 페미니즘적인 자급 과학과 기술, 여성과 민중에 기반을 둔 풀뿌리 지식과 과학을 추구한다.

 

카프라와 시바의 입장도 서로 커다란 차이를 보이는데, 카프라는 기성 연구체제에 속해서 오랫동안고에너지물리학을 가르치고 연구했기 때문에 이로부터 얻은 지식과 통찰을 기반으로 해서 새로운과학 패러다임을 만들어내려 한다. 그러므로 그는 현대과학의 분해나 환원이 아닌 통합적, 전일적,시스템적 접근을 추구하지만 상당한 정도는 근대과학의 방법론이나 지금까지 이루어진 많은 근대과학의 성과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반면에 시바는 핵물리학자가 되려다 방사능의 위험에 눈뜬 후 이론물리학자가 되었고, 그후에는 인도의 사회상황, 환경파괴, 여성에 대한 착취에 주목하면서 이러한파괴나 착취에 서구의 가부장적.식민주의적 과학이 얼마나 크게 기여하는가를 탐구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시바는 근대과학의 인식론적 전통이 근본적으로 환원주의적인 것이고, 이러한 환원주의 과학이 바로 여성과 자연에 대한 폭력의 근원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시바의 에코페미니즘은 자연과 여성에 대한 강제와 폭력을 낳는 근대과학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생명들의 공생관계, “살아있는 관계의 재창조를 주장한다.

 

과학자들 중에서는 가끔 시바와 마찬가지로 제도권 속의 과학자가 되기를 포기하고 과학을 떠나는사람을 볼 수 있다. 이들은 대체로 연구 중에 러브록이 표현한 바와 같은 하찮은연구를 수행하는 동안 현대과학이 기본적으로 자연을 짓밟고 으깨는 작업이라는 것에 대해 회의를 느낀다. 이들의 회의는 근원적으로 과학이 자연을 다루는 방식에 대한 것이다. 예를들어서 이들은 화학에서 분자를 쪼갰다가 다시 붙인다거나 물리학에서 원자를 엄청난 힘으로 부숴뜨리는 행위나 생물학에서 유전자를멋대로 조작하는 행위가 모두 자연 위에 군림하여 자연을 짓밟고 괴롭히는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시바도 원자연구나 생명공학이 연구대상을 공생적 맥락에서 강제로 분리하여조각내고파괴하는 행위이고, 과학자들은 이렇게 하지 않고는 새로운 지식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시바 등의 에코페미니스트들은 새로운 과학 패러다임을 찾기보다는 공생적 관계, 유기적 전체를파괴하지 않고 자연과 공존하며 살 수 있게 해주는 토착기술, 풀뿌리 지식을 강조하는 것이다.

 

자립적인과학을 추구하는 타까기나 러브록은 근대과학의 패러다임을 거부하지 않는 입장이기 때문에 에코페미니즘을 포괄하는 생태주의와는 별로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 이들은 모두 생태주의에대해 친근감을 나타낸다. 러브록은 DNA의 발견을 환원주의적 방법으로 얻어진 가장 위대한 승리로 찬양하면서도 에콜로지와 과학의 재통합을 주장하고, 타까기는 스스로 생태주의를 자신의 삶의 양식으로 삼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근본적으로 현대과학의 자연탐구방식과 생태주의는 양립할수 없고, 따라서 현대과학의 변형이라 할 수 있는 자립적과학도 생태주의와는 연결되기가 어렵기때문에, 러브록이나 타까기 같이 기존 과학연구방법을 인정하는 과학자들은 상당히 모호한 입장을내보이고 있는 셈이다. 차라리 그들이 자립적인과학을 기성 과학시스템이나 환경파괴에 대항하기위한 하나의 도구로만 본다면 이들의 태도가 그렇게 모호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생태주의를 지향하되 생태주의적인 생활을 지키거나 관철하기 위한 대항수단으로 자립적인과학을 이용하는 것이라면 모호함의 문제는 해결되기 때문이다.

 

생태주의의 견지에서 볼 때 모호하다고 여겨지는 태도는 과학계 내부에서 활동하는 반성적인 과학자들에게서 더 자주 발견된다. 이들은 과학계에 몸담고 있고 근대과학의 자연인식을 거부하지 않기때문에, 비록 반성적인 자세에서 양심적인 연구자 생활을 한다 해도 연구의 근본 토대를 뒤흔들 수있는 일이 벌어지면 뒤로 물러서는 길을 택하는 것이다. 예를들어 생명공학 연구자들 중에도 생명공학이 나아가는 방향에 대해서 비판적이고 유전자 조작식품의 위험에 대해 우려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들은 생명을 조작하는 현대 생명공학이 생명을 해체하고 파괴하는 반생명적인 것이므로 연구를 중단해야 한다는 생태주의자들의 주장을 접하면 대체로 방어태세를 취하게 된다. 이때 그들은 생명공학 연구가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인간의 탐구정신을 막을 수는 없고, 연구를 중단하는 것은 인류의 훌륭한 지적 유산인 과학을 부정하고 생명에 대한 지식의 축적을 통한 인류의 진보를 방해할수 있다는 등의 이유를 든다. 생명윤리에 관한 토론회에서 생명공학의 질주에 대해 어느 정도는 비판적인 분자생물학자가 생명공학에 대한 세찬 비난에 직면해서 인류의 생존과 발전을 위해서는 결국 인간 이외의 생물을 물질로 볼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나, 독일의 지도적인 물리학자이자핵발전 반대자로 널리 알려진 한스-페터 뒤르가 뮌헨공대의 연구용 원자로 가동을 반대하는 환경단체들의 운동에 참여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나, 독일 녹색당의 대통령 후보였고 생명공학의 결과에 대해 심각한 우려의 목소리를 내는 분자생물학자 옌스 라이히가 생명공학의 전개는 막을 수 없는 대세이고 그 자신도 유전자 치료를 받아야 할 병에 걸리면 치료를 받겠다고 말하는 것은 모두 이들이 근대과학의 패러다임을 버리지 못한 결과일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기성 과학기술의 개혁을 원하거나 추구하면서도 라이히나 러브록에서 시바에 이르기까지 서로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 다양한 입장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부딪친다. 이들은 서로의 입장 차이 때문에 협력보다는 비판이라는 어쩌면 좀더 손쉬운 길을 택하는 경우도 있지만, 구체적 문제를 놓고 벌어지는 실천의 면(예를들어 핵발전 반대, 유전자조작식품 반대 같은)에서는 대체로 협력의 태도를 보인다. 밖에서 보기에는 입장이 아주 비슷하게 보이는 사람들 사이에서도해소되기 어려운 차이가 종종 존재한다. 예를들어 독일 녹색운동의 구루(guru)격이었고 루돌프 바로와 독일 반원전운동의 정신적 지주로서 바른생활상을 수상했고 오스트리아 녹색당의 대통령후보로 출마했던 문명비평가 로버트 융크는 서로 정신적인 형제라고 불렀지만, 이들은 현대과학기술을어떻게 보아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놓고는 의견일치를 볼 수 없었다.

 

바로는 과학기술의 세계로부터 완전히 떠나야 한다는 낭만주의적인 입장을 보였고, 반면에 융크는과학기술은 여전히 필요하고, 중요한 것은 산업문명을 철학, 종교, 예술 그리고 영성에까지 의존해서 확장하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융크는 지배권력 성격의 과학기술을 조종하고 통제함으로써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환경관리주의적인 태도는 배격한다. 그는 아마 대안적인 오두막집, 미래에 대한 우려, 카프라의 전일적인 비전이 모두 함께 솟아나고이러한 것들이 어우러져 새로운 미래를 열어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가 보기에는 기성 과학기술계에 몸담고 있다 하더라도반성적인 사고와 행동을 하는 독일의 뒤르나 라이히, 미국의 새뮤얼 엡스타인 같이 미래에 대해서진정으로 우려하는 양심적인 과학자라면 이 일에 동참하고 있는 셈이다.

 

기존의 자연지배적, 가부장적, 권력과 밀착된 과학기술체제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과학계의 양심적인 학자, ‘시민과학자’, 생태주의자, 환경론자들이 함께 힘을 합치는 것이 매우 중요할 것이다. 이러한 대항의 단계에서는 과학기술의 패러다임을 거부하든 그렇지 않든, 과학기술을 대항의 도구로만보든 그것 자체를 발전적으로 바꾸어가야 할 인류의 중요한 유산으로 보든 입장의 차이는 중요하지않다. 예를들어 유전자조작식품을 반대하는 운동에는 양심적인 과학자나 과학기술의 민주화를 추구하는 사람들로부터 전통적인 수공업적 기술을 고집하는 아미쉬 공동체까지 모두 참여할 수 있는 것이다.

 

어차피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이 공생할 수 있는 세계를 만들려는 운동이 바로와 같은 반기술적낭만주의나 에코페미니즘 같은 지향 아래 통일될 수는 없는 일이고, 다양한 생각이나 운동이 함께움직여야만 조금씩이나마 변화를 끌어낼 수 있는 마당에 다양성의 인정과 연대란 불가결한 것이다.

 

그리고 어느 하나의 조류 아래에서가 아니라 여러 다양한 움직임이 힘을 합해 나아가야 새로운 미래를 열 가능성이 더 크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자연에 대한 폭력에 기반한 기존 과학기술체제를제대로 파악하고, 이에 대항하는 움직임들, 변화를 꾀하는 움직임들간의 차이를 파악하는 것은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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