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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없음 2013. 7. 3. 09:28

1강 과학의 기원과 고대 그리스의 과학

 

 

1.1 과학의 시작을 정하는 문제

 

 

과학의 발달 과정을 탐구하려 할 때 가장 먼저 제기되는 문제는 과학이 과연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라는 것이다. 세계의 역사를 살펴보면 과학이나 기술과 관련된 활동은 이미 아주 오래 전에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중국과 같은 문명의 발상지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이 모두 과학의 역사에 포함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근대적인 과학과는 매우 거리가 먼 초자연적인 요소를 너무 많이 포함하고 있거나, 오직 실제 생활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만 활용된 실용적인 활동의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과학의 시초를 정하는 문제는 근대적인 과학이란 어떤 것인가라는 정의가 먼저 내려져야만 풀릴 수 있다. 그러나 과학을 명확하게 정의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고, 그렇기 때문에 과학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를 정하는 것도 아주 힘든 일이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근대과학과 공통점을 가진 활동이 언제 나타났는가를 대강이라도 결정하기 위해서는 근대과학과 비슷한 속성을 가진 것이 출현한 때를 찾아내야 한다. 근대과학은 많은 속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 중에서 다른 활동과 구분되는 주목할 만한 속성은 근대과학에서는 자연현상을 관찰하고 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관찰한 것을 바탕으로 합리적인 가설 또는 이론체계를 만든다는 것이다. 근대과학의 또 한가지 특징은 이러한 가설을 입증하기 위해 실험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험은 근대적 실험도구의 출현과 함께 본격적으로 가능해진 것이기 때문에, 과학의 시초를 결정하는 데 고려되어야 할 속성은 아니다.

과학활동의 본질을 규명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인 철학자 포퍼(Karl R. Popper, 1902-1994)는 과학을 지식의 집합체로 봐서는 안되고 오히려 가설 또는 추측의 체계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과학활동의 핵심은 과학지식을 쌓아놓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설명하기 위한 가설의 체계를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이러한 속성을 가진 활동이 오래 전에 일어났다면 우리는 그 때를 과학의 시초로 정할 수 있는 것이다.

 

 

1.2 고대 그리스 과학의 특징

 

 

관찰한 사실을 바탕으로 가설이나 이론을 만들어서 자연 현상을 설명하려는 노력은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자들에게서 처음으로 발견된다. 따라서 과학은 기원전 600년 경에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당시에 그리스의 도시국가인 밀레토스에는 최초의 철학자이자 과학자였던 탈레스 (Thales, BC 7세기)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여러가지 자연현상을 탐구했고, 수학과 천문학에 능했다고 전해진다. 탈레스의 자연철학에서 발견되는 특징은 그가 천둥, 번개, 지진 같은 자연현상을 초자연적인 것, 예를 들면 신의 활동이나 의지 같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연에서 관찰할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설명하려고 시도했고, 추상적인 사고를 통해서 자연을 설명하려 고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설명 방식은 신에 의존하는 방식과 대비되는 것으로 자연주의적인 자연설명이라고 할 수 있는데, 자연을 이러한 방식으로 설명하려는 시도와 가설을 만드는 과정에서 요구되는 추상적인 사고에서 우리는 소위 과학의 시초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탈레스 이전의 고대 이집트와 바빌로니아에서도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과학과 유사한 활동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기원전 1800 년 경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바빌로니아에서는 수학과 천문학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러 있었고, 이집트에서는 기원전 3000년 경부터 역법이라든가 수학 그리고 의학이 발달했다. 수학에서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자릿수 개념을 도입하여 60 진법을 사용했고, 이차 방정식과 몇가지 삼차 방정식을 풀 수 있었다. 또한 기하학적인 방법에 의한 것은 아니지만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알고 있었다는 증거가 남아 있다. 천문학에서도 그들은 별들의 운행을 관찰하여 많은 관측 자료를 남겼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 관측 결과를 바탕으로 몇 가지 천체 현상을 예측하기도 했다. 기록에 의하면 그들은 월식을 예측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집트인들은 태양력을 발명했고 일년을 365일로 나눈 달력을 사용했다. 그들의 일년은 한달이 30일로 된 열두달과 마지막의 5일로 이루어져 있었다. 또한 이집트에서는 하루를 24 시간으로 나누고 그에 맞추어서 시각을 정했다. 이집트의 태양력은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달력의 기본 형태가 되었는데, 세월이 흐름에 따라 오차가 누적되어 로마시대에 와서 율리우스 시저가 그것을 수정, 보완했다. 이것은 로마와 서양 중세를 통해서 율리우스력이란 이름으로 사용되었다. 그후 세월이 흐르는 동안 또다시 많은 오차가 생겨서 1570 년 경에 교황 그레고리우스가 다시 수정하여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형태로 만들었다.

이집트와 바빌로니아에서 비록 그러한 주목할 만한 일들이 일어나기는 했지만, 우리는 이집트나 바빌로니아에서 과학이 시작되었다고 하지는 않는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과학 활동을 할 때 사람들은 현상을 관찰하고 사변을 통해 가설이나 이론을 만듦으로써 이 현상을 설명한다. 이것은 과학 활동의 중요한 특징이기 때문에 이러한 특징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은 과학이라고 불리우기 어렵다. 이집트와 바빌로니아에는 이러한 의미의 과학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의 수학은 실제적인 문제를 풀기 위한 실용적인 것이었으며, 추상적 이론의 단계로 나아가지 못했다. 이집트와 바빌로니아에서 추상적인 기하학이 거의 발달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그 점을 반영하는 것이다. 물론 그들도 면적과 부피를 계산하는 문제를 다루었지만, 이를 통해서 그들이 기하학을 발전시킨 것은 아니다. 면적과 부피의 계산은 측량과 곡물의 양 같은 것을 재기 위한 것이었고, 그것도 기하학적인 방법이 아니라 대수적인 계산 방법을 실제 문제에 응용한 것이다.

바빌로니아인들은 별들은 자세하게 관찰했다. 그러나 그 그 이유는 천체운행의 원리나 법칙을 찾아내기 위함이 아니었다. 별 하나하나가 신과 같고 그것의 운행이 왕국과 왕의 운명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성술에서 벗어나 천체의 운행을 관측함으로써 우주의 체계를 세우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집트에서는 외과 의술이 매우 발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지만, 이집트인들은 근본적으로 병은 악마가 인간의 신체에 들어옴에 따라서 일어나고 악마가 퇴치되면 병이 낫는다고 생각했다. 이와 같이 이집트와 바빌로니아의 수학, 의학, 천문학은 초자연적인 것이나 실용의 문제에서 거의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이집트와 바빌로니아에서 자연현상을 초자연적인 것에 의존해서 설명한 것에 반해 고대 그리스의 탈레스는 세계를 구성하는 근원은 물이라고 했고, 자연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여러가지 그럴듯한 이론을 만들어냈다. 예를 들면 그 전까지 그리스인들은 지진이 일어나는 이유는 바다의 신인 포세이돈이 화를 내기 때문이라는 초자연적인 설명을 받아들였다. 반면에 탈레스는 이러한 신에 의존한 설명을 거부하고 바다 위에 떠 있는 땅이 파도에 의해서 흔들리기 때문에 지진이 일어난다고 말했다. 그는 자연 현상을 설명할 때 신화에 바탕을 둔 초자연적인 것을 배제하고 자기 자신의 합리적인 이론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탈레스보다 조금 뒤에 나온 밀레토스의 아낙시만드로스 (Anaximandros, BC 6세기)는 우주는 작용하는 원리(arche)를 포함하고 있는 무한하고 정할 수 없는 것 (apeiron)이라고 주장했다. 이 아페이론은 형태가 주어지지 않았지만 아르케가 작용하면 점차 형상을 지닌 것으로 바뀌어 가는 물질로 볼 수 있다. 그는 또 생물체는 창조된 것이 아니라 축축한 것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했고, 변화의 과정을 거쳐서 여러가지 다른 모습을 가진 생물체로 되었다고 생각했다. 같은 밀레토스 학파의 한 사람인 아낙시메네스 (Anaximenes, BC 6세기)는 공기를 세계의 근원 물질로 보고, 이 공기의 희박화와 농축화에 의해서 각각 다른 물체가 생성된다고 주장했다.

탈레스와 같은 밀레토스의 자연철학자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중요한 특징은 그들이 자연현상을 자연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을 이용해서 설명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자연주의적 방식의 설명 외에 밀레토스의 자연철학자들을 그 이전 시대와 구별하는 또 한가지 특징은 그들이 다른 사람의 주장을 검토해보지 않고 자기 주장만을 내세운 것이 아니라, 자기 주장을 다른 사람의 것보다 더 설득력 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이다. 근대과학에서도 과학연구자들은 새로운 이론을 내놓을 때 다른 과학자들의 이론이나 실험 결과를 세밀하게 검토한다. 검토 후 자기 이론이 자연현상을 설명하는 데 더 적합하다는 결론에 도달해야만 발표를 결정한다. 밀레토스 자연철학자들이 자기 주장을 펼 때 사용한 방법도 근대과학의 특징에 들어가는 것이다.

탈레스 이전의 그리스와 이집트 등지에서는 세계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자연 현상을 신화를 가지고 설명했다. 이 신화에는 여러 종류가 있었으며 그것들은 각각 독립적으로 세계를 설명했지 서로 경쟁 관계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시 말하면 세계는 평평하고 거인이 떠받치고 있다고 설명하는 신화가 세계는 원반처럼 생겼고 밑에서는 거대한 기둥들이 떠받치고 있다고 설명하는 신화보다 더 설득력이 있고, 이로 인해 사람들 사이에서 더 많은 지지를 얻기 때문에 더 좋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탈레스 이후에 철학자들은 다른 사람의 이론을 검토하고 비판하는 일을 하게 되었고, 그럼으로써 기존 이론의 바탕 위에서 더욱 설득력이 높은 이론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예를 들어서 아낙시메네스가 공기가 세계의 근원물질이고 공기의 희박화와 농축화에 의해서 만물이 생성된다는 이론을 살펴보면, 그가 탈레스의 물에 대한 비판을 통해서 그러한 결론에 도달했으리라는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는 공기나 흙과 같은 물질이 어떻게 물에서 형성되는가 라는 의문을 품었을 것이고, 이것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공기가 물보다 더 근원적이라는 결론을 내렸으리라는 추측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의 주장을 다른 사람의 것보다 더 설득력 있는 것으로 만들려는 노력은 그후 그리스 자연철학자들의 일반적인 방법이 되었다. 뒤에 나오는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학자는 자기 이론을 내세우기에 앞서서 전에 활동했던 철학자들의 주장을 모두 검토하고 비판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이제 우리는, 그러면 어째서 이집트나 바빌로니아 또는 중국이 아니라 그리스에서만 과학이 출현했는가 하는 의문에 직면하게 된다. 이 문제는 매우 흥미로운 것이기는 하지만 만족할 만한 해답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을 단지 그리스에서 일어난 불가사의한 기적과 같은 일이라고 보아 넘기지 않고 설명을 하려고 하면, 그 설명은 모두 대단히 사변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가지 주목할 만한 것은 고대 그리스와 나머지 지역 사이의 정치 제도상의 차이인데, 이것이 과학의 출현과 관련해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이집트, 바빌로니아, 중국은 전제 군주제의 정치 체제를 가지고 있었다. 이집트에서는 태양의 아들인 왕이, 바빌로니아에서는 사제왕이 국가의 정점에서 나라를 다스렸고, 각 개인은 피라미드 형태로 구성된 사회 속 자기의 소속 계층에서 주어진 일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리스의 밀레토스는 독립된 도시국가였고, 독재자에 의해서 통치된 적도 있지만 대체로 민주제도를 정치 체제로 가지고 있었다. 이는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자유민들이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고 각각 다른 의견을 가지고 활발하게 토론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 있었음을 뜻한다. 이러한 여건 위에서 그들은 어느 것이 더 나은 정치 체제인가라는 문제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세계의 생성과 자연 현상에 대해서도 자유롭게 사변하고 토론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자유로운 토론의 분위기가 밀레토스에서 과학이 출현하는 데 기여했다는 생각을 해볼 수 있다.

 

 

1.3 변화의 문제

 

 

밀레토스 학파의 자연철학은 그들의 주장에서 이미 간취할 수 있듯이 관찰과 사변이라는 두 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먼저 자연현상을 관찰했고, 그 다음에 왜 그러한 현상이 일어나는가를 사변을 통해서 설명하려고 시도했던 것이다. 여기서 관찰은 우리 오관 즉 감각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사변은 정신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밀레토스의 철학자들은 관찰하고 사변하는 이 감각과 정신의 활동이 과연 믿을만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조금도 의문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그후에 이 둘을 구분하고 그것들이 어느 정도까지 믿을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하는 철학자들이 나타났다. 이들을 대표하는 사람은 헤라클레이토스(Herakleitos)와 파르메니데스(Parmenides)이다. 이 두 철학자는 우리가 감각으로 파악하는 온갖 변화의 문제, 감각에 의한 지각과 그것의 신뢰성이란 문제를 풀기 위해 깊이 고민했다. 이들이 감각과 정신이 얼마만큼 신뢰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을 던지고 씨름을 벌인 후 이 문제는 그리스 자연철학자들에게 또하나의 정신적 씨름거리를 제공했으며, 그 결과 그들의 사고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었다. 앞으로 다루어질 엠페도클레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데모크리토스 등은 모두 감각을 통해서 파악되는 변화라는 것을 해석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기원전 500년 경에 활동했던 헤라클레이토스는 감각을 불완전하다고 보고 크게 신뢰하지 않았다. 그는 눈과 귀가 말하는 것, 다시 말하면 우리가 감각을 통해서 얻는 것은 우리를 속일 수 있으며, 그것을 정신 (로고스, logos)이 해석할 수 없다면 쓸모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세계의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하고 있는 현상에 깊은 주의를 기울였으며, 이 주의의 결론으로서 만물은 끊임없이 흐른다 또는 변화한다(판타 레이, panta rhei)는 주장을 내놓았다. 그가 보기에는 아무것도 그대로 있는 것은 없는 것이다. 그는 변화라는 현상도 감각을 통해서 아는 것이지만 만물이 어느 것 하나 그대로 존재하지 않고 순간순간마다 변하는 그 사실에 대해 정신을 통해 해석함으로써 만물은 흐른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반면에 겉보기에는 변화 없이 처음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도 감각을 통해서 지각할 수 있지만 그는 이것이 바로 감각이 우리를 속이는 것이라고 보았다. 만물이 끊임없이 흐른다는 생각은 그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우주의 근원물질은 변화의 시발점일 것이며 이것은 불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했다. 왜냐하면 불은 한시라도 그대로 있지 않으며, 끊임없이 불에 탈 수 있는 다른 물질을 삼켜서 새로운 불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파르메니데스는 엘레아(Elea) 출신이었고 많은 제자를 길러냈기 때문에 엘레아 학파의 초기 철학자에 속하는 사람이다. 그는 헤라클레이토스와 거의 같은 시기에 활동한 사람이었으며, 헤라클레이토스와 마찬가지로 감각과 정신, 그리고 변화의 문제를 깊이 다루었다. 그런데 그는 감각을 신뢰하지는 않았지만 감각을 통한 지각을 인정하고 그것을 제대로 해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던 헤라클레이토스보다 훨씬 멀리 나아가서 우리가 감각을 통해서 얻는 것은 모두 환상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파르메니데스에 의하면 우리가 의지해야 할 것은 오직 이성뿐이었다. 그런데 그가 변화에 대해서 내린 결론은 똑같은 문제를 놓고 씨름했고 그와 마찬가지로 감각을 부정했던 헤라클레이토스와는 정반대되는 것이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모든 것이 변화한다고 말함으로써 만물의 근본을 물질 자체의 변화에서 찾았지만, 파르메니데스는 아무것도 변화하지 않으며 변화는 모두 외견상 그럴 뿐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에게는 변화, 운동, 다양성과 같이 우리가 감각을 통해서 지각하는 것은 모두 감각의 환상일 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철저하게 이성에 의지했고, 감각의 환상에 불과한 변화 자체를 완전히 부정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또한 변화는 없기 때문에 존재의 다양성이라는 것도 불가능한 것이었다.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고 그것은 다른 것으로 변할 수 없기 때문에 존재는 오직 하나만 가능한 것이다.

파르메니데스와 엘레아 학파의 변화는 없으며 존재하는 것은 오직 하나라는 주장은 그 후에 나온 그리스 자연철학자들에 의해서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감각과 변화의 부정은 그후 그리스 자연철학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고, 새로운 이론을 주장하려는 사람은 누구나 이 두가지 문제를 검토하고 난 다음에야 자기 이론을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1.4 파르메니데스 다음에 등장한 그리스 자연철학자들

 

 

기원전 5 세기 중엽에 활동한 엠페도클레스(Empedokles)도 파르메니데스의 영향을 매우 많이 받았다. 그는 감각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인정했지만 정신도 마찬가지로 불완전하다고 생각했고, 우리가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감각이나 정신과 같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만물을 구성하는 뿌리 (rhizomata), 즉 근원물질은 흙, , 공기, 불이라는 사원소라고 주장했다. 이것들은 변화하지 않는다. 뿌리들이 변화하지 않는다는 생각은 파르메니데스의 변화는 없다는 주장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엠페도클레스는 우리가 감각으로 지각하는 다양한 존재에 대해서는 파르메니데스와 생각을 달리했다. 파르메니데스는 오직 하나의 존재만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변화하지 않는 네 개의 존재가 있다는 주장을 했던 것이다. 엠페도클레스는 또한 변화를 완전히 무시한 것이 아니라 이 현상을 설명하려고 했다. 그는 우리가 감각을 통해서 느끼는 변화는 이 네 원소들이 사랑과 미움이라는 두가지 원리에 의해서 결합하고 분리되는 과정에서 나타난다고 설명했다. 여기서 사랑은 사원소를 합쳐서 혼합물을 만드는 원리이고, 미움은 이 원소들을 서로 떨어뜨려서 분리하는 원리이다.

 

 

우리는 엠페도클레스의 네개의 뿌리와 두가지 원리에서 엘레아 학파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으며, 그가 이 학파의 주장에 대해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는 변하지 않는 원소를 도입함으로써 한편으로는 파르메니데스의 변화는 없다는 주장을 인정하면서도, 그 원소들이 다수라고 봄으로써 존재의 다양성을 부정하지 않았다. 또한 원소들의 결합과 분해를 통해서 엘레아 학파가 철저하게 부정한 변화와 운동을 좀더 설득력있게 설명하려 했던 것이다.

엠페도클레스와 같은 시기의 철학자 아낙사고라스(Anaxagoras)도 그의 자연철학을 파르메니데스가 남긴 문제에서 시작했다. 그도 엘레아 학파나 엠페도클레스와 마찬가지로 감각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인정했지만, 감각이 불완전한 것이라 해도 우리는 이 감각을 통해서 얻은 것을 기초로 해서 관찰 불가능한 것에 대해 사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또한 변화하지 않는 몇 개의 원소가 존재한다고 하는 엠페도클레스의 생각을 극단적으로 밀고 나아가서 변화하지 않는 씨앗이 무수히 많다고 보았다. 아낙사고라스는 또 이 씨앗들은 각각 우리가 지각하는 성질을 하나씩 가지고 있으며, 어떤 물체든 간에 이 많은 씨앗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물체들이 모든 씨앗을 포함하고 있지만 서로 다른 것으로 보이는 이유는 그 물체 속에 가장 많이 들어 있는 씨앗의 형태가 밖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예를들어 금이라는 물체 속에는 다른 씨앗보다 금 씨앗이 가장 많이 들어있기 때문에 금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온전히 사변의 영역에 머물러 있고 실험을 통해서 증명될 수 없는 것이지만, 그의 주장은 내부의 다양한 형질 중에서 우세한 형질이 발현된다는 것이고 꽤 설득력을 지닌 것이다. 우세한 것이 발현된다는 생각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에서 다시 발견된다.

기원전 5세기 말이 되면 원자론이 나온다. 원자론을 대표하는 사람은 레우키포스(Leukippos)와 데모크리토스(Demokritos)이다. 이들의 원자론도 엘레아 학파의 변화는 없다는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들이 세계의 근본 구성체로서 원자라는 것을 철학에 도입함으로써 엘레아 학파의 변화 없는 존재라는 관념을 수용했다고 말했다. 원자는 파르메니데스의 실재하는 유일 존재처럼 영속하는 것이다. 단단하고 균일하며, 그 자체로서는 변화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창조된 것도 아니고, 생성되지도 않고, 소멸되지도 않는다.

원자론자들에 의하면 세계에는 수많은 원자와 무한한 허공만 존재한다. 이 원자들은 모두 같은 물질로 되어 있고 모양과 배열만 서로 다른데, 이것들은 허공을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서로 부딪쳐서 결합하거나 다시 분리된다. 원자론자들의 이론에서 우리는 그들이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 두 사람의 영향을 모두 받았다는 것을 분명하게 발견할 수 있다. 우선 원자론자들은 변하지 않는 원자를 도입함으로써 파르메니데스의 영원한 불변을 만족시켰고, 또 이 원자들이 허공을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충돌하고 결합하고 분리를 겪는다고 함으로써 헤라클레이토스의 영원한 변화도 만족시켰던 것이다. 여기서 또 그들이 말하는 허공은 파르메니데스의 비존재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원자론자들은 우리가 감각을 통해서 느끼는 물체의 다양성에 대해서도 설명하는데, 그들은 이 다양성이란 원자들의 위치, 배열, 모양의 차이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지금까지 우리는 세계의 근본 또는 원질을 물질적인 것에서 찾는 전통, 즉 자연주의적 또는 무신론적 전통에 속하는 자연철학자들의 생각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리스에는 이러한 전통에 속하는 철학자들뿐만 아니라 이와는 다른 전통 위에 서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것은 종교적 전통으로서 기원전 6 세기 중엽에 활동했던 피타고라스와 그의 제자들이 이 전통을 대표하는 자연철학자들이었다.

앞에서 소개한 자연철학자들은 모든 물체는 근원물질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것은 창조된 것이 아니고 우연히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것의 근원은 근원물질이고, 이것은 처음부터 있었으며, 신들도 인간에 의해서 고안된 것으로 보았다. 반면에 종교적 전통에 속하는 사람들은 영혼이 모든 물체보다 먼저 존재했고, 세계는 정신이나, 계획이나, 신의 섭리에 의해서 지배된다고 보았다. 앞의 자연주의적 전통에 서서 철학을 했던 대표적인 그리스 철학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이고, 종교적 전통을 대표하는 철학자는 플라톤이라고 할 수 있다.

피타고라스 학파는 일종의 종교집단이었다. 그들은 영혼은 불멸이고 한 육체에서 다른 육체로 전달된다고 믿었으며, 육체는 영혼을 잠시 가두어두는 틀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의 근본적인 목적은 영혼의 정화를 통해서 궁극의 정신 세계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피타고라스 학파에서 발견되는 특이한 점은 그들이 영혼의 정화를 위한 도구를 수학에서 발견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기하학과 수 이론에서 두드러진 발전을 이룩했으며, 더 나아가서 세계를 구성하는 물체가 모두 추상적인 수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1은 점, 2는 선, 3은 면, 4는 입체라는 식의 주장을 했던 것이다. 피타고라스 학파의 수를 신비화하는 사상은 플라톤과 헬레니즘 철학자들 그리고 나중에는 르네상스 자연철학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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