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오 2013. 7. 12. 21:01

인간과과학 제6

 

16세기와 17세기에 형성된 근대과학에는 천문학, 물리학 그리고 생물학 분야가 들어있지만, 화학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화학분야의 혁명이라고 할 만한 것은 다른 학문분야보다 약 100년 쯤 늦게 일어났는데, 그 이유는 화학이 다른 분야와 달리 수학적 계산을 통해서 근본적인 법칙을 발견하거나 정밀한 관찰을 통해서 새로운 기본 원리에 도달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주론과 역학에서 탐구자들은 천체현상 내지 지구상에서의 물체의 운동을 정확하게 관찰하고 수학적으로 다룸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에서 가르치는 원리들과는 완전히 다른 근대적인 법칙들을 내놓을 수 있었다. 또한 생리학에서는 내부 기관들의 작용을 정확하게 관찰함으로써 피의 순환에 기초한 근대적인 이론이 만들어졌다. 반면에 화학 현상, 즉 물질의 변화라는 분야와 관련해서는 근대 화학의 개념이나 이론과 비교할 만한 새로운 것이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르네상스 시대에 연금술이 다시 융성하고 공업적 화학이 발달함으로써 실용 화학에서 많은 새로운 결과들이 쌓였고 이러한 결과들을 해석하기 위해 여러 철학자들과 화학자들이 새로운 해석틀을 세우려고 했지만, 화학의 기초가 될 만한 근본적인 물질이론은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화학 분야에서 혁명적인 전환을 이룩할 이론은 18세기 말, 19세기 초에 라부아지에와 톨턴에 의해서 확립되었다. 라부아지에의 연소이론과 원소이론 그리고 돌턴의 원자론이 19세기에 화학이 급속도로 발달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해준 것이다. 화학에서 이러한 전환이 왜 그토록 늦게 일어났는가에 대한 이유는 물질 변화의 원인이란 다른 분야에서와는 달리 우리가 감각으로 인지한 것을 가지고 추론해내기가 매우 어렵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물질의 외적인 변화는 우리의 감각을 통해서 인지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원인을 찾는 일은 항상 정신 세계의 사변이라는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투사체 운동의 궤도를 결정하는 일은 투사체가 어떻게 운동하는지를 정확하게 관찰하고 그것을 수학적으로 기술하기만 하면 끝나는 것이다. 그것이 왜 포물선을 그리는가라는 원인을 탐구하는 것은 운동에 관한 연구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반면에 물질의 변화는 이 변화의 원인을 알아야만 설명과 예측이 가능하기 때문에 원인에 대한 탐구는 화학 연구에서는 필수적이면서도 매우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에 근대화학은 다른 분야보다 100년이나 늦게 등장했던 것이다.

 

화학이 근대적인 학문의 모습을 갖추게 되는 것은 역학이나 천문학보다 백년쯤 뒤에 일어나지만, 화학과 관련이 있는 활동은 오래 전부터 존재했다. 예를 들어서 화학적 기술과 연금술은 이미 고대에 시작된 것이었고, 18세기에 화학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계속해서 발달해 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야금술이나 염료와 알콜의 생산 같은 화학적 기술은 체계적인 이론이 없이 주로 경험에 기초해서 이루어졌고, 연금술은 물질의 변환이라는 신비적인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으로부터 순수한 화학이 발전하기는 어려웠다. 화학은 약학이라든가 의학하고도 관계가 깊었다.

이와 같이 화학은 실용적인 기술이나 연금술과 관계가 깊었고, 따라서 16,17 세기에 화학분야에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은 대체로 화학기술과 연금술 두 분야에 모두 관여하고 있었다. 그런데 17세기에 근대 천문학이나 역학이 완성되어 가면서 화학도 학문자체로서 연구할 만한 것이고 학문으로서 정립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퍼지게 되었다. 이러한 생각을 대표했던 사람은 영국의 로버트 보일이었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나오면서 18세기 초부터 화학 분야에서도 어느 정도 순수한 학문이 발달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기 시작했다. 이 기틀은 주로 영국과 프랑스에서 두 나라의 지적, 사회적 풍토에 따라 서로 상당히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18세기에 그때까지 알려져 있던 화학현상 전반을 설명해 주었던 이론체계는 플로기스톤 이론이었다. 플로기스톤 이론은 석탄이나 나무가 불에 잘 타는 이유는 그 속에 플로기스톤이 많이 포함되어 있고, 이것이 물질이 탈 때 그 물질로부터 빠져나오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설명했다. 이 이론은 연소만이 아니라 금속의 하소( 瑕燒, calcination)도 금속에서 플로기스톤이 빠져나오기 때문에 일어난다고 설명했다. 하소는 금속이 높은 온도에서 산소와 결합하는 현상을 말한다. 금속이 서서히 녹이스는 것도 일종의 하소로 볼 수 있다. 또한 플로기스톤 이론은 광석을 숯불로 가열해서 금속을 얻는 제련과정에 대한 설명도 제공했다. 이 이론은 금속이 생성되는 이유를 숯이 탈 때 플로기스톤이 빠져나와 광석하고 결합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광석이 플로기스톤을 얻음으로써 금속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현재 나무가 타거나 쇠가 녹스는 이유는 나무나 쇠가 산소와 결합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연소나 하소가 물질 속의 무언가가 빠져나감으로써 이루어진다는 설명이 아주 이상하게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일상경험에 비추어 보면 나무나 석탄이 타고나면 원래의 물질은 거의 다 없어지고 재만 남기 때문에, 연소 때에 무언가가 빠져나간다고 하는 생각이 더 타당한 것처럼 보인다. 이와 같이 플로기스톤 이론은 일상경험에도 부합하고 여러가지 현상을 일관성 있게 설명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당시의 화학자들 사이에서 널리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 플로기스톤 이론에 문제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당시에 화학자들 중에는 여러 기구를 사용해서 상당히 정확하고 정량적인 실험을 수행했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금속의 하소실험을 한 결과 이때 생성된 금속재의 무게가 원래 금속의 무게보다 더 크다는 사실을 밝혀냈기 때문이다. 이것은 플로기스톤이 음의 무게를 가지고 있다고 가정하면 설명될 수 있는 현상이었지만, 금속재의 무게가 줄지 않고 더 늘어났다는 것은 이 이론의 큰 문제점으로 부각되었다.

 

플로기스톤 이론이 널리 퍼져있던 시기에 영국에서는 스코틀랜드 지방을 중심으로 기체화학이라고 불리우는 분야의 연구가 활발하게 수행되고 있었다. 이러한 연구를 수행했던 대표적인 과학자들 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사람은 프리스틀리이다.

 

프리스틀리는 고정공기를 연구했고, 초석(질산칼륨)의 공기(질소)와 염산공기(염화수소)를 발견하는 등 기체화학 분야에서 여러가지 연구업적을 남겼지만, 그 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공기의 두가지 성분에 관한 연구였다. 다시 말하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질소와 산소에 관한 연구였던 것이다. 그는 밀폐된 공간에서 촛불을 태웠을 때 그 속의 공기의 양이 줄어드는 현상을 관찰하고 공기가 두가지 성분으로 조성되어 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1772년에는 하소에 관해서 연구하던 중에 공기의 5분의 1만이 하소에 소비되고 나머지 5분의 4의 공기는 하소를 일으키지도 못하고 생물체에 유독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발견을 통해서 그는 공기가 두가지 성분으로 조성되어 있다는 자신의 결론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같은 해에 프리스틀리는 초석으로부터 연소를 돕는 성질을 가진 공기를 유리했다. 이것은 산소를 가리키지만 그는 이것을 다만 순수한 공기의 일종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후에도 그는 계속해서 금속의 하소에 관한 연구를 통해서 공기의 구성성분을 조사하는 일에 몰두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프리스틀리는 1774년에 수은의 금속재를 가열해서 분해하는 실험을 했으며, 이 실험을 통해서 연소를 돕고 물에는 녹지 않는 성질을 가진 공기를 순수하게 분리할 수 있었다. 이것은 산소라고 하는 아주 새로운 물질의 발견이었고, 플로기스톤 이론의 폐기를 가져올 수도 있는 매우 중요한 발견이었다. 그렇지만 프리스틀리는 이 발견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당시에 자신의 이 중요한 발견에 대해서 어떠한 해석도 내리지 못하고, 단지 그것을 자기 동료들에게 알리는 정도로만 그치고 말았다.

프리스틀리는 또한 다른 실험들을 통해서 이 공기가 호흡에도 아주 좋다는 사실을 확인했지만, 그는 끝내 이것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산소라는 사실을 밝혀내지 못했다. 오히려 그는 플로기스톤 이론에 집착한 나머지 이 공기를 플로기스톤이 없는 공기라고 불렀다. 그가 그렇게 불렀던 이유는 이 공기가 플로기스톤이 없기 때문에 다른 물질로부터 플로기스톤을 잘 빨아들이고, 그 결과 연소를 돕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프리스틀리는 그 반대 과정, 즉 수은이 플로기스톤이 없는 공기와 반응해서 금속재가 되는 실험도 했는데, 이 실험도 플로기스톤 이론을 가지고 설명했다. 이와 같이 프리스틀리는 산소를 발견했으면서도 그것을 산소로 인정하지 않고 플로기스톤이 없는 공기라고 불렀고, 산소와 금속의 결합이나 그 둘의 분리도 모두 플로기스톤 이론으로 설명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는 평생동안 연소는 산소와의 결합이라고 하는 라부아지에의 새로운 연소이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프리스틀리가 발견한 이 기체가 산소라는 사실은 프랑스의 라부아지에에 의해서 밝혀졌다. 라부아지에는 1743년에 파리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변호사였다. 집안의 전통에 따라 라부아지에도 처음에는 법학을 공부했다. 법률가로 직업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그는 생계는 주로 국가의 세금징수를 감시하는 일을 해서 꾸려나갔다. 그런데 라부아지에는 왕정의 세금징수를 도왔다는 이유로 1794년에 프랑스 대혁명의 혼란기에 자코뱅당에 의해서 처형당하는 비운을 겪었다. 그 자신은 프랑스 혁명에 적대적이지 않았고 상당히 자유주의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었으며, 당시의 과학자들 사이에서 대단한 명성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목숨을 잃었던 것이다.

라부아지에가 처음에 관심을 가졌던 분야는 지질학이었다. 그는 암석이나 흙의 성분 등을 연구하다가 화학에 흥미를 갖게 되었고, 1760년대 말부터는 본격적인 화학연구를 시작했다. 라부아지에는 자신의 연구를 통해서 연소이론을 확립하고 화학 명명법을 도입함으로써 근대화학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볼 수 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 자신은 새로운 물질을 발견한 것은 별로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대체로 영국의 프리스틀리나 다른 화학자들이 했다고 하는 실험 이야기를 듣고 그 실험을 다시 반복했고, 거기에서 나온 결과를 새롭게 해석함으로써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라부아지에가 과학자로서 뛰어났던 점은 그 이전의 아주 혼란스러웠던 화학으로부터 근대화학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제대로 간파했고 그 일을 실행했다는 것이다. 그 당시의 화학은 그리스의 4원소설이나 연금술 그리고 기체화학의 성과 같은 것들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고 마구 뒤섞여 있는 상태였다. 라부아지에는 이러한 상태에서 근대화학을 창조하기 위해서 필요한 일이 무엇인가를 파악했고 그 일을 실제로 수행했던 것이다.

 

1772년 라부아지에는 자기자신이 결정적인 실험이라고 불렀던 실험을 수행했다. 이 실험은 황이나 인을 태워가지고 그때에 생성되는 기체의 무게를 정확하게 재는 매우 양적인 실험이었다. 그는 이 실험에서 연소 과정 중에 생성된 기체의 무게가 감소하지 않고 오히려 늘어난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또한 하소에 의해서 금속재가 생성될 때에도 무게가 증가한다는 사실을 실험을 통해서 확인했다. 라부아지에는 이 두가지 사실로부터 무게의 증가가 물질이 공기를 흡수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추론을 하게 되었다.

금속이 하소할 때 무게가 증가한다는 사실은 이미 1세기 전에 로버트 보일도 실험을 통해서 알고 있었다. 보일은 그 이유를 밝힐 수 없었지만 라부아지에는 연소실험에서 얻은 결과에 힘입어 1774년에 이 실험을 정확하게 되풀이한 뒤 무게가 증가하는 이유는 금속이 공기나 공기의 구성성분을 흡수하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당시에는 이 공기 또는 공기의 성분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해결하지 못했다.

1774년 말에는 프리스틀리가 파리를 방문하여 자신의 실험에 관해 강연을 했다. 이 강연에서 라부아지에는 수은의 금속재를 렌즈를 사용해서 열분해하면 어떤 순수한 공기가 얻어진다는 프리스틀리의 실험 결과를 듣게 되었다. 라부아지에는 이 이야기를 듣고 당장 그와 비슷한 실험을 반복했다. 그 결과 그는 수은의 금속재를 가열했을 때 기체가 생성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고, 또한 이 기체가 금속이 하소할 때 그것에 흡수되는 기체라는 것도 확인했다. 그러나 라부아지에는 그 당시에는 이 실험에서 생성된 기체가 공기이거나 공기의 순수한 성분이라고만 생각했지 산소라는 결론을 내리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하고 말았다. 그 뒤에 그는 화약의 원료인 질산칼륨(초석)을 연구하던 중에 이것을 분해하면 공기의 순수한 부분과 산화질소가 나오고 이 기체와 산화질소를 물에 녹이면 질산이 생성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연구를 통해서 그는 1776년에 질산은 산화질소와 보통 공기의 가장 순수한 부분 및 물이 결합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그것을 발표했다. 그는 이 연구를 다른 산을 대상으로 확장했는데, 이때 탄산, 황산, 인산 등의 산에도 이 기체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리고 이 기체를 옥시겐, 즉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산소라고 명명했다. 이 옥시겐이란 말은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말로서, 산을 만든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라부아지에는 산을 만드는 기체에 관한 연구를 게속한 결과 이 기체가 연소와 하소가 일어날 때 물질과 결합하는 기체라는 사실도 확인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산을 만들고 연소와 하소에 관여하는 기체인 산소라는 존재가 발견 또는 확인되었던 것이다. 그 후에 라부아지에는 물을 분해하는 실험을 통해서 물이 수소와 산소의 화합물이라는 사실과 호흡도 산소가 서서히 결합되는 현상이라는 것을 밝혀냈고, 1780년대 말에 연소는 물질이 산소와 결합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바탕을 둔 연소이론을 내놓았다. 이 새로운 연소이론이 나옴으로써 화학은 연소를 완전히 거꾸로 설명을 했던 플로기스톤 이론, 다시말하면 연소가 물질이 어떤 것하고 결합하는 화학반응이 아니라 플로기스톤이 빠져나가는 것으로 설명을 했던 이 이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라부아지에는 또한 새로운 연소이론을 확립한 것뿐만이 아니라 새로운 명명법을 도입함으로써도 근대화학의 확립에 기여했다. 라부아지에의 새로운 명명법은 화합물의 이름을 보면 그것이 어떤 원소로 구성되어 있는지를 알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물질의 이름은 그 전까지는 그것의 성질이나 출처 등에 따라서 아무 기준도 없이 정해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라부아지에는 먼저 원소의 이름을 정한 다음에 물질들에 체계적인 방식으로 이름을 붙였던 것이다. 예를 들어서 탄산염 속에 들어 있다가 또는 고정되어 있다가 가열하면 나온다고 해서 고정된 공기라고 불리웠던 물질이 새 명명법에 따라서 이제는 산화 탄소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고, 황산은 그 전에는 비트리올이라고 불렀는데, 이제 황산이라는 새 이름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산화탄소라든가 황산이란 이름은 모두 그것이 어떤 원소로 구성되어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즉 산화탄소는 탄소와 산소로, 황산은 황과 산소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그 이름 자체가 말해주는 것이다. 라부아지에는 물질을 구성하는 여러 원소와 그것의 화합물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1789년에 화학원론 이라는 책으로 출판했다. 이 책은 그후에 체계적인 화학이론을 담은 화학 교과서와 같은 역할을 함으로써 화학 교수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라부아지에가 이와 같이 새로운 연소이론을 내 놓고 체계적인 명명법을 고안했다고 해서 화학분야의 혁명이 완성되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아직도 원자라는 개념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라부아지에는 여러가지 원소의 존재를 바탕으로 그의 화학체계를 만들어냈지만, 그는 그 원소가 각각 특정한 무게를 지닌 원자로 환원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우리는 예를 들어서 산소라는 원소의 최종 구성단위는 산소 원자 하나이고 이 산소 원자는 특정한 무게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라부아지에는 원자의 존재를 거부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화학분야의 혁명은, 그 후 프루스트가 일정성분비의 법칙을 내놓고, 돌튼의 원자론과 배수비례의 법칙에 의해서 화합물의 조성이 설명되면서 완성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생물학은 물리학이나 천문학과 달리 19세기에 들어와서야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권에서 벗어났다. 물론 17세기에 하비에 의해서 혈액순환 이론이 확립됨으로써 근대 천문학이나 역학과 함께 생리학 분야의 혁신이 일어나기는 했지만, 생리학은 생물학의 작은 분야의 하나였기 때문에 생물학 전체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생물학은 결국 18세기를 거쳐 19세기에 들어와서야 진화론, 유전학, 근대적인 분류학이 성립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벗어나 근대과학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그 중에서 진화론의 확립은 생물학 전체뿐만 아니라 사회 사상에도 대단히 큰 영향을 미쳤다.

 

진화론은 다윈이 종의 기원을 출판함으로써 확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다윈 한 사람의 노력에 의해서 성립한 것은 아니다. 이미 다윈과 거의 같은 때에 월리스가 말레이지아 군도를 여행하면서 자연선택의 반복에 의한 생물진화라는 생각에 도달했고 이것을 다윈보다 먼저 발표하려 했던 것이다. 이 사실은 당시에 그리고 그 전에 이미 진화라는 관념이 사람들 사이에서 싹트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진화론은 다윈에 의해서 체계화되기는 했지만 그 확립에는 여러 분야의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음을 무시해서는 않된다. 진화론의 형성에 영향을 미친 학문분야로는 지질학, 자연신학, 고생물학, 분류학 등을 들 수 있다.

 

19세기 초까지 사람들은 대체로 종은 처음부터 현재 가지고 있는 형태를 갖추고 있었고 변하지 않는다고 하는 종의 안정성과 불변성을 믿었다. 그러나 18세기를 통해 자연사가 발달하고, 특히 자연사의 한 분야였던 지질학이 발달하면서 지층의 생성에 관한 이론이 출현했다. 지층의 생성에 관한 당시의 대표적인 이론은 수성론(水成論)과 화성론(火成論)이었다. 수성론은 지층의 형성에서 물의 작용을 중시하는 이론이었고, 화성론은 불의 작용을 중시하는 이론이었다. 이중에서 화성론이 진화 관념의 형성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수성론을 대표하는 사람은 베르너라는 독일의 광물학자였다. 수성론에 의하면 최초에 원시대양이 지구 전체를 둘러싸고 있었고, 그 속에는 많은 물질이 녹아 있거나 입자로 흩어져 있었다. 그런데 바다의 수면이 낮아짐에 따라 바다 속에 녹아있거나 흩어져 있던 물질이 원시암석으로 석출하여 바닥에 쌓였고, 이에 의해 지구표면은 처음으로 암석층으로 둘러싸이게 되었다. 그 다음에 바다 수면이 더 낮아지면서 이 암석층의 일부가 물밖으로 나와 육지가 되었고, 그후 이 육지가 침식되고 바다속의 물질들이 석출하여 또다시 바다 밑바닥에 쌓임으로써 두번째 암석층이 생성되었다. 수성론에선현재 우리가 발견하는 암석층들은 이러한 과정이 계속된 결과로 형성되었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수성론의 가장 큰 문제점은 처음에 물이 어디에서 와서 어떻게 줄어 들었느냐를 설명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수성론이 물을 중요시한 것에 반해 화성론은 열의 역할을 중시했다. 화성론을 대표하는 인물은 영국의 허튼이었다. 화성론은 오래 전부터 육지가 존재했으며 이 육지가 침식에 의해서 깎이고 이 물질들이 바다에 침전한 다음에 지구의 열을 받아 단단해져서 암석층이 형성되었고 설명했다. 그리고 이 암석층은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지구 내부의 열과 압력에 의해서 융기하고, 이동하고, 변형되는데, 이에 의해서 갖가지 형태의 산과 골짜기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화성론에서는 이러한 침식과 암석의 형성 그리고 융기 이동 변형이 오랜 기간을 두고 계속해서 반복하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현재의 지구가 형성되었다고 주장했다.

수성론은 원시대양이 최초에 있었다가 점차 없어졌고, 지표면의 불규칙성은 바다의 대격변으로 설명했기 때문에, 지구의 역사를 길게 잡을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화성론은 육지의 침식과 침전, 융기와 변형이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지구의 나이를 매우 긴 것으로 가정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 후에 화성론이 수성론보다 더 설득력있는 것으로 인정되어 학자들 사이에서 널리 받아들이면서 이 지질학적인 아주 긴 시간은 생물체에도 적용가능한 것으로 생각되었고, 그 결과 화성론은 생물체가 갑자기 창조된 것이 아니라 긴 시간을 통해서 점점 변화되었다는 진화의 관념이 형성되는 데 기여하게 되었다.

 

 

진화관념의 형성에 기여한 자연신학의 목적은 신이 창조한 자연을 관찰함으로써 신의 섭리를 발견하는 것이다. 이것은 18,19 세기에 영국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연구되었다. 자연신학에서 추구했던 것이 무엇인가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19세기 초에 영국에서 활동했던 자연신학자 페일리(William Paley)의 유명한 유비관계이다. 이것은 시계와 시계공의 관계를 자연과 신의 관계와 대비시킨 것인데, 그는 우리가 시계를 보면 그것을 만든 시계공이 있음을 알 수 있듯이 자연을 보면 그것을 창조한 신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페일리는 이러한 유비관계를 가지고 우리가 자연을 관찰함으로써 신의 계획과 섭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던 것이다.

자연신학이 진화관념의 형성에 공헌한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생물의 적응이라는 문제에 관한 연구였다. 우리는 자연계의 모든 생물체가 주위 환경에 적응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자연신학자들은 생물이 적응 메카니즘을 갖게 된 것은 신이 생물체를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갖도록 자비롭게 창조한 결과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생물체의 환경에 대한 적응이라는 예를 통해서 신의 자비를 보여주기 위해 그와 관련된 많은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했다. 이러한 자료들과 연구결과가 진화관념이 형성되는 데 기여를 했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이러한 자연신학자들의 생각에서 더 나아가서 생물이 환경에 적응하는 것은 신의 자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과정에 의해서 그렇게 된다는 생각을 하면, 바로 진화라는 생각이 도출된다.

 

 

고생물학은 생물체의 화석잔재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화석들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는 프랑스의 라마르크와 퀴비에에 의해서 처음으로 시작되었다. 이들 고생물학자들의 화석 연구가 진화 관념이 형성되는 데 도움을 주기는 했지만, 그들은 라마르크만 빼고는 대부분 퀴비에로 대표되는 격변론(catastrophism)을 지지하는 사람들로서 생물체가 진화한다는 생각에는 철저하게 반대했다. 라마르크는 주로 무척추 동물의 화석을 연구했는데, 그는 이 화석들이 서로 다른 지층에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비슷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에 대한 해석과정에서 생물이 진화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진화론을 제창한 다윈은 이와 같은 여러가지 배경, 즉 진화관념이 서서히 생성되기 시작하고 있던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고 교육을 받았다. 그는 평범한 학생 시절을 마치고, 16살 때에 의사가 되기 위해 에딘버러 대학 의학부에 입학했다. 그러나 1828년 해부학 시간에 구토를 일으키며 교실을 뛰쳐나간 뒤 의학 공부를 포기하고, 성직자가 되기 위해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공부했다.

다윈의 본격적인 생물학 연구는 1831년에 시작된 비글호 항해에서 시작되었다. 항해를 떠나기 직전에 그는 생물이 진화한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데 커다란 영향을 받게 되는 책을 한권 받았는데, 이 책은 지질학자 라이엘이 쓴 지질학 원리 (The Principles of Geology)였다. 이 책에서 라이엘이 주로 주장했던 것은 현재는 과거에 대한 열쇠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즉 지질학상의 문제들, 예를 들어 지층이나 암석이라든가 바다 생물의 화석이 산에서 발견되는 것 등은 모두 현재 일어나고 있는 자연현상을 가지고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현재는 과거에 대한 열쇠라는 라이엘의 주장은 다윈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 주었고, 다윈은 항해에서 관찰한 것을 이 라이엘의 원리를 빌어서 설명을 시도하게 된다. 예를 들어서 그는 칠레에서 강한 지진으로 인해 땅이 갑자기 솟아오르는 현상을 관찰했는데, 이것으로 그는 바다조개의 화석이 산에서 발견되는 사실을 설명했던 것이다.

항해 중에 다윈이 관찰한 것 중에서 진화론 형성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친 것은 갈라파고스 군도의 동물들이었다. 이 섬들은 남아메리카 해안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그러나 거기에서 살고 있었던 도마뱀, 거북이와 같은 동물들은 군도 밖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것이었다. 군도를 이루고 있는 여러 섬들 사이의 동물들 가운데도 차이가 있었다. 다윈은 또다시 라이엘이 지질학 원리 에서 내놓은 현재는 과거를 푸는 열쇠라는 생각을 이용해서 이 문제를 풀려는 시도를 했다. 우선 그는 분명히 이 군도는 화산의 폭발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처음에 섬에 생물체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 동물들은 육지에서 왔을 것이다. 그렇지만 육지의 동물들과 크게 다른 이유는 오랜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변이가 일어났기 때문일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즉 다윈은 육지의 동물과 섬의 동물들은 조상은 같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해서 현재는 완전히 다른 종이 되어버렸다고 결론지었던 것이다.

 

 

비글호 항해는 1836년에 끝났다. 다윈은 영국으로 돌아와서 자기가 비글호 항해 중에 얻었던 결론, 즉 하나의 옛 종으로부터 새로운 종들이 변이 과정을 거쳐 생겨난다고 하는 생각을 발전시키는 데 몰두했다. 그런데 결정적인 문제는 왜 변이하느냐, 다시 말하면 변이 메카니즘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 다윈은 이것을 찾는 중에 농부들이 식물과 동물들을 인위적으로 번식시켜 우수한 형질을 얻는 것에서 어떤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 대한 연구 끝에 그는 생물을 인위적으로 선택해서 번식시키면, 많은 변이를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런데 문제는 자연 속에서도 그런 변이 과정이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그것은 어떤 메카니즘에 의해서 일어나는가 하는 것이었다.

자연 속에서 작용하는 변이 메카니즘을 찾던 중 1838년 가을에 다윈은 우연히 맬더스의 인구론을 읽게 되었다. 이 책에서 그는 자신이 오랫동안 찾았던 해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인구론 에서 맬더스는 인간 사회에는 근본적으로 식량부족 현상이 있고, 그렇기 때문에 생존을 위한 싸움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는데, 다윈은 이 생존경쟁을 생물체에 적용했다. 즉 그는 이 생존을 위한 싸움에서 변이를 일으키는 힘을 발견했던 것이다. 생존경쟁이란 생각을 자연에 적용하여 다윈은 자연에서 태어나는 개체의 수가 살아남아서 번식하는 개체의 수보다 항상 많다면, 그리고 이 개체들 속에서 변이가 일어나고 그 변이가 유전된다면, 끝까지 살아남는데 도움이 되는 변이가 일어난 개체가 남아가지고 자손을 번식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런 식으로 오랜 기간동안 변이가 집적되면 나중에는 자연히 주위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할 수 있는 개체들이 생겨난다는 것이 그의 중요한 결론이었다. 이와 같이 적응 능력이 강한 개체가 남는 과정을 그는 인위선택과 대비되는 개념을 사용해서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이라고 불렀다.

 

다윈은 자연선택이라는 메카니즘을 가지고 새로운 종의 출현 즉 종이 진화한다는 것을 설명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이것을 즉시 발표하지 않고 그 후 20년이라는 긴 세월을 그 증거를 찾는 일로 보냈다. 그 이유는 그가 자기 생각을 공식적으로 발표했을 때 생겨날 수 있는 여러가지 문제들, 예를 들면 기독교와의 마찰이라든가 그 자신에 대한 엄청난 비난 같은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 이유는 그가 소심한 성격의 소유자여서 공개적인 논쟁을 아주 싫어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생존을 위한 싸움을 이론화한 대 이론가가 자기 이론의 생존을 위한 싸움에서는 용감하지 않았던 것이다.

 

만일 다윈이 1858년에 월리스의 논문을 받지 않았더라면 그의 진화론에 대한 출판은 더 늦어졌을 것이다. 월스는 자연사나 생물학을 따로 배우거나 연구하려 한 사람은 아니었으나, 직업상 남아메리카와 말레이지아를 여행할 수 있었고 이때 그 지역의 동식물을 관찰했다. 이 관찰 여행에서 그는 각 종들의 차이에 대해서 주목하게 되었고, 종 사이에서 변이가 일어날 것이라는 생각을 했으며, 다윈과 마찬가지로 인구론을 읽고 그 메카니즘을 발견했다. 다윈과 똑같이 야생동물의 삶은 생존을 위한 투쟁이고 그 결과 생물체들의 진보와 분지가 있다는, 즉 새로운 종이 자연선택에 의해서 출현한다는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월리스는 자신의 결론에 관한 짤막한 논문을 써서 다윈에게 보내고, 그의 마음에 들 경우 학회지에 발표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 논문을 받고 다윈은 크게 낙담했다. 왜냐하면 그 논문을 발표할 경우 발견의 우선권은 월리스에게 돌아가고, 다윈의 오랜 기간에 걸친 연구는 헛수고가 되고 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때 라이엘의 중재에 의해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라는 견해는 두 사람의 이름으로 발표되었다. 공동 발표 뒤 다윈은 종의 기원 의 집필에 몰두하여 몇개월만에 탈고해서 출판했다.

 

 

종의 기원 (The Origins of Species)은 출판되자마자 결국 다윈이 염려했듯이 신학자들의 매우 커다란 반발에 부딪쳤다. 물론 다윈은 충돌을 피하기 위해 인간의 기원이라는 미묘한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았다. 또한 그의 이론이 원칙적으로 기독교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 원래부터 자연신학자들은 자연법칙을 신의 섭리의 표현으로 보지 않았느냐고 반문하면서, 자연선택에서도 신의 섭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 암시를 했다. 그러나 책이 출판되자마자 터져나온 논쟁의 봇물은 막을 길이 없었다.

종의 기원이 과학과 사회에 미친 영향은 대단히 컸다. 생물학자들이 자연선택설을 받아들이는 데는 시간이 걸렸지만, 이 책은 그 생물학자들 대부분을 진화론자로 만드는 데 기여했고, 생물체가 신의 설계에 의해서 창조되었다는 생각을 버리게 만들었다. 사회에 대한 충격도 매우 컸다. 진화론이 옳건 그르건간에, 그것은 인간을 자연 속에 존재하는 것으로 자연의 일부분으로 보기 때문에 인간의 문제 즉 인간의 특성 기원 운명에 관해 아주 새로운 생각을 갖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다윈 진화론의 영향을 받아 나온 것 중에서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것은, 개인과 개인 또는 국가와 국가 사이의 생존을 위한 경쟁이 인류 역사의 발전에 기여한다고 하는 사회 다윈주의 (social Darwinism)이다. 사회 다윈주의를 대표하는 인물은 영국의 철학자 스펜서(Herbert Spencer)이다. 그는 적자 생존 (survival of the fittest)이라는 말을 만들어냈고, 거의 모든 사회현상에 이 진화 관념을 적용했다.

다윈의 이론에서 가장 큰 문제점은 변이가 어떤 방식으로 유전되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다윈은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끝내 해결하지 못하고 말았다. 유전의 문제는 오스트리아의 수도사 멘델에 의해서 해결되었는데, 그의 유전 법칙은 1900년에 가서야 드 프리스, 코렌스, 체르막의 재발견에 의해 인정을 받게 되었고, 그후에 생물학자들은 다윈의 진화론과 유전 법칙을 종합하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이 두 이론이 결합된 종합 진화 이론 (Synthetic Theory of Evolution)은 그후에도 수십년이 지난 뒤에야 완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