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오 2013. 7. 12. 21:04

인간과과학 제10

 

와인버그(Steven Weinberg, 약력,전자기적 상호작용 연구로 노벨상 수상)나 펜로즈(Roger Penrose. 영국의 수리물리학자) 같은 물리학자는 양자역학과 일반상대성이론을 통합하는 대통일이론이 완성되면 진정한 의미의 과학은 더이상 존재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리학자들 사이에서 모든 것의 이론(theory of everything)으로 통하는 이 이론이 그들의 희망대로 지구상의 모든 현상을 설명해낸다면 과학은 사실상 종말을 고하게 되는 셈이다. 사회생물학을 종합한 윌슨(Edward O. Wilson)은 이들보다 한걸음 더 나아간다. 그는 자신의 이론이 사회과학계나 철학계에 미친 영향에 만족하지 않고 모든 지식을 통합하고 연결함으로써 (통섭 concilience) 궁극의 지식에 도달하고자 한다. 그가 희망하듯이 이 지식이 우리는 누구이고 왜 지구상에 존재하는가를 설명해주면 그 이상의 근본적인 지식추구는 불필요해질지 모른다.

 

 

21세기에도 과학자들 중에는 모든 것의 이론이나 궁극의 지식에 도달하려는 꿈을 버리지 못하고 과학의 종말을 가져오기 위한 연구에 몰두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이들의 꿈이 실현되어 과학의 종말이 올지, 그렇지 않으면 이들의 연구작업 자체가 과학기술 연구망 속에서 중요성을 잃고 주변으로 밀려나 결국 종말을 맞을지는 예측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20세기 말에 이루어진 수많은 과학기술적 발견들의 특성과 21세기에 과학기술을 주도할 분야의 성격으로 미루어볼 때 궁극적 이론을 찾는 작업은 점차 의미를 상실할 가능성이 높다. 궁극적 이론뿐만 아니라 이론 자체가 과학기술의 중심으로부터 밀려나 주변화할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예측의 신빙성은 20세기 말에 과학계에서 이루어진 두드러진 발견이나 세간의 커다란 관심을 끈 성취들이 대부분 이론과는 거리가 멀었고, 21세기 과학기술을 뒤바꿀 디지털혁명과 유전자혁명이 이론적 작업에 기초를 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뒷받침해준다. 20세기 말에 과학계뿐만 아니라 세상에 굉장한 충격을 준 과학적 사건은 복제양 돌리의 탄생이었을 것이다. 이 사건이 사회에 미친 파장은 20세기 초에 확립된 양자론의 영향보다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다. 개개인의 피부에 와닿는 충격만을 놓고 보면 돌리가 훨씬 더 강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돌리는 양자론과 달리 거대이론이 아니라 수의학 연구자가 만들어낸 하나의 동물에 불과했고, 정치한 계산과 논리에 근거한 이론의 결과가 아니라 수백번의 시행착오를 거친 기술적 노력의 결과였다. 그런데 이 기술적 발명이 체세포 복제는 불가능하다는 생물학의 정설을 완전히 무너뜨렸고, 생식공학과 생식유전학에 커다란 전기를 가져왔다.

 

 

20세기 후반기에 물리학에서 이루어진 발견 중 가장 의미있는 것으로 꼽히고 있고, 1987년 미국 초전도체 학회에 수많은 학자들이 몰려들게 만든 베드노르츠(J.G. Bednorz)와 뮐러(K.A. Müller)의 초전도체 합성도 이론의 뒷받침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초전도체 금속산화물 속의 금속원자를 여러 차례 바꾸어가면서 실험하던 중에 절대영도보다 35도나 높은 섭씨 마이너스 238도에서 초전도현상을 보이는 물질을 얻게 된 것이다. 이들의 발견은 절대영도에서 23도 높은 온도가 초전도 현상의 한계라고 하는 그때까지의 물리학 이론을 무너뜨렸다. 과학자들의 광대극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만일 사실로 판명이 났다면 돌리 탄생과 맞먹는 대사건이 되었을 화학자 폰즈(Stanley Pons)와 플라이쉬만(Martin Fleischmann)의 상온핵융합 실험도 이론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오히려 영구운동기관과 같이 물리 이론가들이 보면 터무니없는 것이 실험실에서 시도되었고, 1억도 이상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져온 핵융합이 섭씨 수십도에서 이루어졌다는 보도가 한동안 전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것이다.

 

 

게놈 해독이라는 바탕 위에서 진행되고 있는 유전자혁명은 그야말로 기술적인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게놈 해독 연구는 유전자나 유전자 조각의 증식, 절단, 절단부위 맞추어보기 작업을 끝없이 반복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작업이 대부분 컴퓨터와 자동분석기기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만 다를 뿐 기술자들이 컨베이어벨트 위에서 공업생산품을 조립하는 것과 별 차이가 없다. 작업의 최종결과가 중요한 이론을 만들어낼 수 있는 기초를 제공하는 것도 아니다. 염색체를 구성하는 DNA 가닥의 염기서열을 상세하게 보여주고, 그럼으로써 특정 유전자가 위치한 부분을 분명하게 해줄 뿐이다.

 

 

게놈 해독과 이에 근거한 유전자나 단백질 해독에 힘입어서 얻어질 수 있는 많은 생물학적 성취들도 이론적 연구와는 거리가 멀다. 유전병의 치료, 암 치료, 수명 연장, 배아나 수정란의 유전자조작, 줄기세포를 이용한 장기생산, 유전자변형 생물체 개발 같은 모든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과정은 시행착오라는 기술적인 학습과 성취 작업이다. 유전병 치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특정 유전자와 유전병의 상관관계를 실험적으로 밝히는 작업이고, 그 다음에는 정상유전자가 이식된 바이러스를 이용해서 결함유전자를 정상유전자로 대체하는 것이다. 여기서 이론이나 계산은 아무런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오직 정교한 조작만이 중요할 뿐이다. 인류문화를 획기적으로 변화시킬지도 모르는 수명 연장도 어떤 이론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수명에 관여하는 유전자를 실험을 통해서 찾아내고 이들 유전자와 텔로미어(telomere, 염색체 말단에 존재하면서 세포가 영구히 분열하는 것을 막는 작용을 하는 유전자)를 정교하게 조작하는 것이다.

 

 

수십년 후면 인간의 수명을 수백년 늘리는 기술이 개발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생명공학자들이 신봉하는 이론이란, 과학적 이론의 지위에는 도달하기 어려운 인간의 수명에 한계가 있다는 생각은 아무 근거도 없다는 것이다. 수정란이나 초기 배아의 유전자를 조작하거나 그 핵 속에 유전자 팩이 담긴 24번째 염색체쌍을 주입해서 디자인된 아기를 만들려는 것도 모두 정교한 기술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지, 생물학을 뒤흔들 새로운 이론을 요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19세기와 20세기 초반에 이루어진 다윈의 진화이론, 멘델의 유전법칙, 진화이론과 유전법칙을 종합한 새로운 종합이론, 그리고 20세기 중반에 확립된 분자생물학으로 유전자혁명의 이론적 작업은 거의 마무리된 셈이다. 디지털혁명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양자론도 20세기 중엽에 거의 완결된 것이다. 컴퓨터칩의 성능이 18개월마다 2배씩 증가해서 2020년경이면 컴퓨터가 인간 두뇌와 맞먹는 기억능력이나 계산능력을 갖게 된다는 예측은 특별한 이론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컴퓨터 기술의 경험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즈음이면 작아질 대로 작아진 칩 부품 하나에 담길 수 있는 전자의 수가 줄어들어서 극소화가 더이상 진행될 수 없는 물리적인 한계에 도달할 터인데, 이를 해결하고 컴퓨터의 성능을 더 높이기 위해서 획기적인 이론이 출현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기존 컴퓨터의 한계를 무너뜨리고 엄청난 용량을 지닐 것으로 예측되는 양자컴퓨터의 이론적 바탕을 이루는 양자론은 20세기 초에 나온 것이다. 양자컴퓨터는 전자가 회전하고 있고 그 축의 방향이 동시에 위와 아래를 향할 수 있다는 양자론의 기본적인 발견을 계산에 응용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양자컴퓨터가 성공적으로 개발될 수 있는 관건은 어떤 특별히 새로운 이론이 아니라, 계산에 이용되는 양자를 외부로부터의 간섭이 완전히 차단된 공간 속에 집어넣고 조작하는 극도로 정교한 기술이다. 나노기술이나 나노로봇의 경우에도 그것의 가능함을 증명한 파인먼(Richard Feynman)이 기본이론을 제공한 것처럼 이야기되지만, 파인먼의 증명이란 원자를 한 개씩 다루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물리학 원리는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노기술의 성공 여부도 인간이 원자 수준의 작업을 볼 수 있고 실제 작업할 수 있는 능력, 즉 기술개발에 달려 있다.

 

 

또한 인간보다 지능이 훨씬 높은 로봇이 인간을 밀어내버리는 상황도 대단한 이론이 제시되어야만 올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러한 세계를 열어주는 열쇠는 성능이 굉장히 뛰어난 컴퓨터 하드웨어와 그 능력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쏘프트웨어 기술이다. 이러한 세계의 도래에 회의적인 사람들도 이론에 근거해서 자신의 견해를 펴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제시하는 근거란 단지 현재 하드웨어와 쏘프트웨어가 모두 인간을 능가하는 로봇을 만들 수 있기에는 미흡하고, 앞으로 양자컴퓨터같이 성능이 뛰어난 컴퓨터가 나오더라도 그것에 맞는 쏘프트웨어를 만들어내기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도 이론이 아니라 기술적인 한계가 문제이다.

 

 

정보통신기술유전공학과 더불어 우리 삶을 뒤흔들 것으로 여겨지는 신경과학의 발달도 거의 기술적인 조작의 수준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신경과학의 주된 연구대상인 두뇌는 정신이 깃들여 있는 과학 저편의 영역으로 간주되기도 하지만, 두뇌 연구자들은 모든 정신현상을 두뇌에서 일어나는 물리화학적 작용의 결과로 생각한다. 두뇌 연구의 최고 권위자로 꼽히는 다마지오(Antonio Damasio)는 인간의 행복과 슬픔, 즐거움과 아픔, 그리고 의식과 관련된 두뇌작용이 밝혀질 것이라고 말한다. 두뇌 연구자들은 염색체 속의 DNA 염기서열을 자동화기계로 분석하듯이 두뇌 또한 영역을 잘게 나누어서 분석하여 지도를 만들고, 이 지도 속의 부분들이 어떤 정신작용과 연관되어 있는지를 밝혀내는 작업을 한다. 이 작업을 위해 필요한 것은 특정한 이론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두뇌를 수많은 영역으로 나누어서 샅샅이 스캔할 수 있는 장치, 스캔된 정보를 코드화해서 저장하는 대용량 컴퓨터, 그것을 3차원 이미지화해서 판독하는 기술 등이다. 이러한 작업을 거쳐 두뇌의 작용이 해명된 후, 그 다음 단계로 두뇌와 컴퓨터를 연결하는 작업이나 싸이보그적 인간을 만드는 것도 모두 기술의 영역에 속하지 여기에 새로운 이론이 필요하지는 않다. 물론 두뇌 속에서 일어나는 물리화학적 작용과 인간의 정신적감정적 행위를 연결해주는 설명은 정신작용의 이해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이 설명이 두뇌에 관한 거대이론으로 정립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21세기 과학기술에서 이론의 역할이 아주 주변적일 수밖에 없다고 해도 여전히 거대이론을 꿈꾸는 연구자들은 존재할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이론으로써 다시 한번 양자론이나 상대성이론 또는 유전이론이 가져온 것 같은 사회적정신적 충격을 불러일으킬 것을 희망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른바 초끈이론(superstring theory)이 완결되어 대통일이론으로 자리잡는다 해도 그것은 물리학의 한 분야인 입자물리학 연구자 중에서도 소수 이론가들의 지적 유희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1960년대에 등장한 표준이론이 통일이론에 대한 환상을 되살려놓았지만, 그것의 가장 큰 성과는 거대 입자가속기 붐을 일으켜 입자물리학자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입자 사냥에 나서도록 한 것뿐이다. 여러 물리학자들이 표준이론에서 예측하는 입자들을 발견해서 노벨상을 받기는 했지만, 이들의 연구에 대해서는 물리학자들 사이에서조차 무의미하다는 평가가 있다는 사실은 거대이론의 추구가 21세기 기술혁명의 시대에는 과학기술에서 미미한 역할밖에 못하는 주변적인 것으로 추락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정보통신기술유전공학신경과학나노기술 같은 혁명적인 과학기술을 뒷받침하는 이론은 이미 모두 발견되었다. 21세기에 인간사회의 물질적정신적 분야에서 혁신을 가져올 것은 바로 이들 기술이지 새롭고 획기적인 이론은 아니다. 21세기 과학기술로 초래될 혁명적 변화는 끊임없는 기술개발에 의해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이 현실세계의 주도원리로 떠오른 이 시대에 인류가 좀더 나은 세계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지혜롭게 활용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점은 새삼 언급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문제는 전체를 조망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따라서 통제가 거의 불가능한 21세기 과학기술을 지혜롭게 활용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하는 점이다. 분산적 네트워크형 기술로서 전세계에서 누구나 끼여들어 조작할 수 있는 인터넷을 적절하게 조종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생명공학의 경우에는 시민들의 합의나 법 제정을 통해서 통제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지만, 그것의 강한 분산적 성격 때문에 제대로 통제하기는 대단히 어려운 것 같다. 인터넷이라는 네트워크형 기술이 분산적인 조작이나 공격에 노출될 수밖에 없고 이로 인한 불안정성을 지니고 있지만, 그렇다고 인터넷 속에서의 해커나 싸이버 테러리스트의 활동으로 인해 국가체제가 무너지거나 인터넷이 전면 마비되는 전복적인 사태가 일어날 것 같지도 않다.

 

 

인터넷의 조망 불가능성과 중앙 컨트롤 포인트의 부재 때문에 교란은 끊임없이 일어나지만 전체적인 전복은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네트워크의 개별 구성분자는 자유롭고, 유연하며, 신속하게 변신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모여서 만드는 네트워크는 해커 등의 공격으로 약간 흔들리기는 해도 전체가 흔들리는 일은 없다. 전체의 중심, 감시와 통제의 중심이 없는 씨스템에서는 공격을 통해 권력 전체를 빼앗을 중심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그렇다면 과학기술의 지혜로운 활용이란 성취될 수 없는 것인가? 21세기 과학기술의 특성에 비추어볼 때, 패러다임 전환을 통해서 과학기술 전체를 전일적이고 생태적인 것으로 바꾸려는 카프라(Fritjof Capra) 식의 시도는 성공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 지혜롭게 활용하는 것은 어느정도 가능할 것 같은데, 이때 필요한 지혜는 원칙적으로 기술과 사람의 관계가 본질적으로 달라질 때 얻어지겠지만, 구체적인 실천의 차원에서는 과학기술 전체와 개별 과학기술의 성격을 규명해가는 과정에서 얻어질 수 있을 것이다. 개별 과학기술 중에는 본래부터 민중의 해방에 기여할 수 있는 특성을 지닌 것이 있을 것이고, 그렇게 되기 어려운 특성을 지닌 것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서 에너지 기술 중에서 핵발전 기술은 민중이 활용하기에 대단히 어려운 면을 가지고 있지만, 태양광 발전기술 같은 재생가능 에너지 기술은 민중에게 아주 친근하고 해방적인 것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들 기술에 대한 접근에서 중요한 것은 적절한 기술을 선택하고 부적절한 기술을 배제하는 것이다. 두 가지 에너지 기술은 어느 하나를 배제하더라도 전기생산이 크게 교란되지 않기 때문에 둘 사이의 선택과 배제가 가능하다.

 

 

그러나 인터넷과 같이 대단히 복잡하고 지구 전체에 걸쳐 있는 기술은 대안적인 기술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처음부터 선택과 배제가 불가능하다. 이 경우 기술의 성격을 규명하는 작업이 대단히 중요해지는데, 이러한 성격 규명이 선행되어야만 이를 활용해서 최대한의 해방적인 결과를 끌어낼 수 있는 방법이 얻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생명공학은 인터넷보다 분산적인 성격이 훨씬 강하고 그러면서도 파괴적일 수 있기 때문에 지혜롭게 활용하기가 더 어려울지 모른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성격을 규명하고, 대안적 기술을 모색하고, 그게 불가능하다면 최적의 활용방법을 찾아나가는 작업에 커다란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